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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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 완벽한 생을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을 부러워하며 나는 하루하루 과거를 소급해보며 ‘재탄생’을 위한 발로를 갖기 위해 거리를 산책하거나 가만히 공상에 잠기곤 했다.



20살 때는 대학에 갈 생각을 안 했다. 그저 본질을 구현하고자 하는 심엄한 노력의 치열만이 거기에 잔존했다. 나는 나의 기투를 하이데거식 ‘현존재’로 시현코자 했다. 그러나 본질 하나만으로는 그 어떤 존재도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르트르 말마따나 ‘본질 자체’만으로는 그 어떠한 것도 될 수 없다. 그렇다. 존재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질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현상 편린’의 연쇄를 하나의 ‘현상학’적 방법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그것이 대자적인 ‘인간 실존’이요, ‘절대 정신’, ‘객관 정신’, ‘주관 정신’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비전의 수립인 것이다.



지금 내 나이 24살, 대학을 가기에는 늦은 나이일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고졸로 독학을 해 엄청난 양의 학식을 쌓아 저서를 쏟아냈지만 이는 그 시절이 아직 근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탈근대인 현대는 더욱더 대학이 시대정신과 모든 학문의 범주의 총아로서 떠오르는 중심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나는 이를 거스를 수 없다. 물론 대학을 위한 공부는 제도권 공부라는 수단을 피해갈 수 없다. 그 핵심이 국어, 수학, 영어, 사회이다. 번호를 매겨 출제되는 문제들의 주체성을 의심한다는 건 진부한 짓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이런 학문의 기계화를 수모하고 난 미래를 열어가는 지평을 새롭게 정초해야 한다. 고졸로 남는다면 그저 주저앉음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학계도 무릇 학벌을 ‘사회 일반’보다 더 엄격히 따지는데 내가 꼭 대학에 가지 않으면 난 저명한 학자의 제반을 포기하는 것일 테다. 포기란 있을 수 없다.



요즘은 ‘임석진’이 감수한 ‘철학사전’을 도취된 채 보고 있다. 이 사전은 현재까지 나온 한국 학사상 유례없는 대사전인데 가격도 30만원이 넘어가는 ‘대’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이 사전으로 말미암아 철학 기본 용어의 어원과 그 심원함의 도를 깨달았고, 절두절미 내 철학지식의 윤곽이 명정하게 잡혀가는 기분 좋은 성취감을 맛보았다. 이미 세계 철학사상의 정석이 된 서구철학과 이데올로기를 알기 위해서는 이를 주조하는 기본 용어들의 철두철미한 파악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방대한 학식을 쌓지 않고는 그 누구도 내가 세상을 안다고 방약무도하게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 안다는 것은 곧 양심 있는 ‘영혼’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더 광활무비한 의식지평의 확장을 꾀한다는 ‘학인’으로서의 윤리의 열정성을 의미한다. 사르트르는 ‘근본’을 중시하는 철학계를 일약 전회시켜 ‘실존’의 선행을 창도했고, 이는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생을 만들어 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정할 수 있다는 미래지향적인 고색창연함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의 전범을 그는 20세기 초에 이미 정립한 것이다.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 사실 그럴 나이이기도 하다. 사실 애인이란 사춘기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사람에게 있어서는 꼭 필요한 게 ‘현실’이다. 인간은 아직 ‘짐승’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포유류적 존재이므로, 섹스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공격성을 달리 다스릴 방도가 없다. 결혼한 사람에게도 물론 애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첩’이라는 제도가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결혼 이후의 이성을 확보하는 것을 불법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법적으로 피고인을 된통 당하게 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도 결혼 이후의 이성 확보는 죄악이요, 간음이다. [성서]에서는 결혼을 통하지 않은 성관계를 ‘범죄’로 지정하고 있다. 사실 난 이런 결혼 이후까지 생각할 처지는 아니다. 나는 ‘자식’이라는 방해물 없이 홀로 평생 학문을 탐구할 것이다. 자식은 지식인은 물론 예술가에게 있어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을 통한 대리만족 사고방식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자식에게 그 가문의 책무를 지워주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결혼에 반대하거니와 사르트르가 계약 결혼을 했던 것을 위대하게 생각한다. 그는 자식을 두지 않아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것이다. 루소 역시 자식을 고아원에 버려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좀더 냉엄해지고 비인간적으로 전화되어 참된 지식으로의 이월을 꾀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갖자. 각성과 흥분의 파노라마에 휩쓸려 사상의 향연을 분출하며 세대를 철두철미 파악하려는 자세를 갖자. 동정심과 애정을 갖지 말고 오직 ‘이데올로기의 날카로운 칼날’로 사회를 매스로 도식화시키는 ‘차가운 지성’의 묘미를 깨우치자. 모든 불미로운 감정의 맹아를 제거하여 절치부심하지 않고 하나의 객관화된 유물론적 관점에서 우주의 근원을 초월하는 자세를 취하자. 따라서 ‘탈아’하여 정치한 ‘전체적’ 지적 시도의 일괄만을 적시하라. 자아라는 방해물에서 벗어나 실존적 지의 구체적 지양을 표본하라. 이념의 가없는 색채의 유별을 깨닫고 허물없는 영혼의 ‘의’를 유미하라.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감에 따라 내 글도 저문다. 하루를 보내고 또 내일이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가 언제나 새롭고 날마다 더 진화되어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획도 중요하지만 지나친 목적론적 의식과 과도한 독서는 창의성을 고갈시키는 법이다. ‘의식 그자체로’, ‘사태 그자체로’, 전진해나가야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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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고는 마치 다이아몬드를 다듬듯 섬세하게 다듬었습니다. 비록 장편소설의 서막이지만, 본 소설은 투고에 사용되는 만큼 스크랩의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많은 네티즌 분들의 냉철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대입은 천천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늦은 만큼 서두를 필요는 없겠고, 오히려 큰 그릇을 만들 듯 천천히 완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1. 類比

 

장엄했던 삶의 마무리는 정신병자라는 도착적 과정에서 가련하게 도출되었다. 슬픔은 무리를 따라, 밑도 끝도 없는 아스라한 연역을 따라 마침내는 지리멸렬한 환멸로 귀결되었다.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고, 과거를 따라, 그 극점을 따라 여행했던 도착지는, 바로 윤리와 계급도덕의 한계를 거스르는 순수의 영역, 거대담론의 종언적 지점, 따라서 인류보편을 지향하는 시의 피안이자 개인의 인식과 오관을, 거기에 딸려오는 사고의 공전을 극복한, ‘초절적인 불가지론의 환영이었고, 그 그림자가 나타내는 지고의 진선미였다.

 

그렇지만 현실이 내게 직사하는 건, 나라는 주체가, 그리고 내가 동고하는 타자들이 외계에 입문해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러한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는 점, 즉 부르주아 지상주의 그리고 이와 무관하지 않은 현실이란 초자본주의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강령에 동감하여, 나는 대악大惡이 정점에 달한 시대에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다른 이들을 구원함으로써, 그들의 미소 속에서 나의 미래를 찾아야했다. 나는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깊은 휴머니즘적 사고방식만이, 마르크시즘-레닌이즘만이, 부르주아라는 마왕을 배격하는 일만이, 자본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만이, 부처와 예수의 뜻에 따르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방법론이라는 걸 안 것이다.

현대는 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 이용당하는 사회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모든 건 자본주의가 잉태했고, 악의 시원은 곧 자본의 맹아에 진배없다. 진짜 악인들은 상류층이고 그들이 체제를 선포하고 모두를 이용해먹는다. 악인은 몇 푼의 돈으로 인해 그 선의 이면이 귀신으로 변모한다. 오늘날의 악은 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필경 희생양들을 재앙처럼 번식시킨다.

 

오류, 오류의 파편들이 다시금 파편을 재생산하는 병적인 시대, 그 가운데 나는 이런 현실적인 따라서 합리적이고 더러운층차에서 벗어나는, 즉 시대를 표류치 않는 생득적인 본질직관의 아우라Aura를 표본으로, 형이상 층위에서, 조형적인 문예도상의 거점에서, 기형적인 절대초극의 연쇄적 연역을 따라, 이 질주의 몰입을 완벽히 방조한 나 자신에 환멸하며, 구체적 음영이 드리우는 조소의 반영을, 희끄무레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불현듯 죽어가면서 깨달은 사실은, 내가 살아보고자 하는 건 논리가 아니라, 미의 정수를 밝히는 영원불멸의 자각인 것이었다. 나는 낭만주의만이, 현실이라는 더러운 정치학적 세계를 잊고, 인간의 이해 타산적 인식관의 인과관계성을 타파할 유일한 시뮬라크르라는 걸 알았다. 어떤 의미에서 시뮬라크르는 이데아를 초월하기도 하므로.

 

내게 삶은 전체적인 환멸에로의 탁마였고, 진귀한 유년시절이라는 시원은 끝없는 통속으로 인해, 완전하게 분쇄되었으며, 언제나 절필을 선언했지만, 결국 내가 택한 건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지나감으로써의 글쓰기였고, 내게 이런 괴로운 도정의 응시는 지고의 개인주의를 지향한다는 데서 오는 자족감으로부터 발본된, ‘한 편의 철학적 서사시의 필사의 감미로운 알레고리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모든 정태적인 마감에는 한없이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뒤따랐을 뿐이었다.

 

나는 살아가기보다는 선택하고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는 관념의 부정변증법의 세속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 생은, ‘기억의 집합에서 나아가야하는 비전의 개시’, 양자 사이의 모색이 모종의 정신분열증이라는 왜곡된 격률로서 다가올 뿐이어서, 요컨대 나는 정합성의 세계가 아닌 모순의 세계에서 실존의 구체적인 섬광을 찾아 해매는, 한 마리의 황야를 떠도는 늙은 이리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당당히 소급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을뿐더러, 대놓고 나의 지성을 과시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불안이 아니라 안정에서 비로소 영감을 구명해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간절히 소원한다. 내 추억, 내 변모의 정체적 과정이, 내겐 한없는 불안과 불면의 밤의 미로라는 공간 안에 의거해서, 그 영광스런 패배의 족쇄에서 어떤 목적론적 의식에 집착하지도 않고, 한때 내가 미묘하게 빠져들었던 종교와도 흡사했던 군국주의적 쇼비니즘과 아직까지 내 사상적 유영의 근간을 이루는, 오늘날에도 생생한 마르크스주의를 잠시 제쳐두고, 지금은 단지 선험적 형이상학의 담론이라는 광풍의 한가운데에 고하여, 지조 없는 지성의 소용돌이의 현현顯現 아래서, 대오와도 같은 간지의 역광을 마주보며, 따라서 하나의 기하학적 정신의 버팀목 위에서, 그리고 살아간다는 사고방식의 선형적 둘러싸임에서, 결과적으로 이 사차원적 시차에서 어지러이 방황했을 뿐이었기를.

 

나는 다만 나의 기투가 어긋난 그것이 아니기를, 역사 이래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신에게, 단아한 몸가짐으로 기도드렸을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고, 그 믿음을 내 학자로서의, 인생이라는 이름의 광시곡으로, 은은히 외양 세계라는 풍경에 울리고 싶을 뿐이다.

 

달은 아득히 세계의 비애를 표양한다. ‘인간존재이기에 주어진 슬픔의 무게는, 그 진중함의 역설을 상기하며,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온전하기를 노래했다. 아니 그들이 나처럼 비극적인 존재로 굳어지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차라리 내가 영원한 환멸의 환상을 부여받음으로써, 세상이 눈과 같은 순정으로 변용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존재를 구성하는 의식의 시간성을 좀먹는다는 게 오직 자신의 속물주의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모르는 속인들은 시대의 아들을 자처하고 나설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제자리걸음에 불과함이, 서글퍼진다.

 

이지러진 달이 그처럼 교교한 자태를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고매한 사유를 받듦으로써 외부적 현실성을 초절했기 때문인 것을. 오로지 고귀하고 심원한 정신만이, 피투와 기투를 일원화시킴을 그들은 모른다. 무릇 표리일체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렇지만 많은 인간들은 나의 한 측면만을 보고, 모종의 정언적 판단을 내린다. 즉 나의 피투가 아웃사이더의 전형이라고, 그러니까 그들은 나를 골방폐인이라고 비방하고, 이 사회에 있어서 하등 쓸모없는 일종의 미치광이, 비주류의 범주를 떠도는 가련한 망령이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는 항진명제가 아닐 수 없고, 그들은 정당하다. 나는 졸렬한 모리배의 무리와 동류가 아니라고 호소한다 치더라도 그들은 나를 외면할 것이고, 이는, 최소한 이 영역까지는 나를 이해하는 적절한 패러다임이라고 감히 부정하지 못하겠다. 여기까지는 그들이 근거 있는 실증주의 과학에 입각한 자명한 해석을 내린 과감한 지향성을, 그들의 이성의 심판대에 나라는 죄인을 세운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지향성을, 내가 부정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별 헤는 밤이 오면, 포효하는 별들이 검은 하늘을 밝힐 것이고, 그 찬란한 우주의 시현에 나는 지금껏 써왔던 내 개인의 역사가, 내가 흐느끼며 써왔던 눈물방울 아린 연약한 시들이, 내가 아파왔던 과정이 의미하는 고매한 이데아가 옳다고, 내 정신의 다재다능함과 종횡무진 내달리는 총체성만은, 그것만은 믿어달라고, 나는 침묵의 진중성불침투성의 어지러운 뒤범벅과 함께, 마치 이미 고색창연해져서 빛바랜 고대의 시들을 읊는 것과도 같이, 하나의 해명과 비스무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릴 것이리라.



지나감, 지나감, 오직 그것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하는, 어떤 초월적인 개별자임을 자처하게 하는 확정적인 취미는, 경향은 존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우리가 우리이게 금하는 자기동일성의 공시적 파노라마의 펼쳐짐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순간적인 나타남에 의지하는 현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이라는 흐름, 개별자로서의 역사라는 흐름에서 주체성을 되찾고, 과거도 현재도 아닌 오직 미래를 향해 변용해나가는 대자존재로 현전할 때, 그 기투의 복잡다기한 변증법은 비로소 의미의 시현이 당도한다는 명확성을 재단케 하리라.

 

박명은 요원하고, 양주의 새벽은 장마의 이슬에 맺혀, 묵묵히 허공에 쓸쓸함을 흩뿌린다. 유년기에 그 정초적 출발점을 둔 생에 대한 관조는 저절로, 일체의 사영斜影을 나의 의식 속에 패배적인 비약과 고무라는 부정의 먹물로써 떨어드린다. 모든 것이 신의 영역 저변으로 미끄러진다.

 

이윽고, 나는 나라는 분열적 영혼에 신사적인 동의를 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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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이성비판 3 - 실천적 총체들의 이론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6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자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사르트르는 존재를 일원적인 측면에서, 일의적인 구도로써 현상학적 이론으로 귀결시켰다. 그에겐 존재의 나타남(인간적 실재의 현현), 즉 존재의 현상의 배후에 그 어떠한 초월적인 절대 요소는 존재치 않으며, 따라서 이러한 나타남의 도리란 단지 전적으로 존재자의 본질 즉 존재함에 의거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는 존재의 나타남을 ‘존재현상’이라는 추상명사로 축약하여 하나의 정리를 완성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나의 판단에 현상이란, 항시 영겁이 개개의 대상이 추동해나가는 ‘도출’의 힘이며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무라는 막이 유의 실재적/주관적 본질성을 가리더라도 ‘후설’이 말하는 “본질직관”의 힘은 영구히 대명사를 초월하여 비시간의 동시성을 보장할 것이다.

나는, 나의 스승 사르트르로 말미암아 그의 존재론이 필사하는 몰노마드적 총체성을 요해했다. 무릇, 사상에는 그 어떠한 비과학적인 ‘형이상학적 방법’이 사변이성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위험한 법이다. 이는 ‘독단론적인 창도’에 불과하며, 자연적 변연이 아닌 ‘시대에 국한한 일그러진 관념론’으로 환원될 따름이니까. 따라서 관념론에 ‘변증법적 방법’이 시행된 것은 극히 혁명적인 풍조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지적 움직임은 일종의 ‘포월’이다. 인간존재가 이성의 한계를 초극하고자 하는 노력이 고안해낸 최상의 ‘정신노동’이라 일컬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극점에는 유미주의의 실존적인 기생이 발본해있다. 유미주의란 어떤 의미에서는 탐미 즉 미학적인 퇴폐로의 이행이라 부를 수 있을 테니, 앞서 말한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성의 초월적 확장)’과 ‘자연을 영유하기 위한 시원에로의 탐구(유미주의의 영유)’의 치열한 대비는, 우리가 이 이분법적인 극단적 양자택일에 귀의할 경우 그것이 하나의 딜레마라는 ‘배리’에 함몰되지 않고 거의 병적으로 치닫는 ‘승려적 대오’에 진배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언제나 사영에 빠지면서도 ‘객관적인 실재’가, 즉 유물론에 대한 열렬한 지지의 형태로써 발원하는 자기 인식관의 명약관화함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판단착오이다. 우리가 ‘우주’라고 깨닫는 패러다임은 사실은 현대과학의 산물에 불과하다. 아니, 그 인식관이 고대 때부터 발본되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좀더 오관의 연산적인 확장에 몰입할 필연적인 ‘의미론의 생생함에서 근거하는 지적 열정’의 계시에 심취될지도 모른다. 단지 ‘이성’이라는 관념의 심판대도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이며, 신이 선택한 ‘종’이며 모든 만물의 왕이라는 오만함에 기인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형이상학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요컨대 파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가 보다 한층 넓은 의식지평을 생성하지 못한 채 자기 ‘존재의 존재’에 대한 기만으로 흘러가기 십상일 수도 있다. 물론 혹자는 나의 글이 앞서 제기한 ‘형이상학적 방법’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뒤편에서는 형이상학을 옹호하는 ‘자승자박’에 몰렸다고 비웃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태 껏 형이상학의 세계, 인간 조건의 피안, 불가지적 범주를 결코 부인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형이상학의 적극적인 옹호자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형이상학에 도달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방법’이 의미하는 것은, 전혀 논리학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히 언어유희에 경도되어 마치 ‘하이데거’식으로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주절거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지고의 논리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엄밀한 논리성으로 철두철미하게 이론적으로 인간존재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과학적으로 구명하는 걸 의미한다. 다시 말해, 헤겔이 자신의 사유에 변증법을 도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논리학적인 방법론을 구축해서 ‘선험적 관념’의 영역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아득히 먼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철학이 과학을 아우르는 분야였다. 그러한 게 분유되면서 ‘철학’이란 좀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으로, ‘과학’이란 좀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관점으로 이월되었다. 또한 근대에 이르러 철학이 여러 가지 분과로 나누어 지고, 과학 역시 그렇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 그 어떤 학자도 불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현대의 철학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모든 분과에 입각해야할 요인이 생긴 것이다. 이는 잔인할 정도로 세밀한 분과성을 극복하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 비전의 수립자로 거듭나는 ‘지고의 철학자’로서 ‘우주 전체’를 관통할 혁명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표상해야하는 학문에 대한 윤리학적 정초를 뚜렷이 절대자에게서 계시 받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터이다. 따라서 현대의 철학자들은, 그리고 철학자로 운임할 후학들은 평생의 시간을 ‘학문 일반’에 바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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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이성비판 2 - 실천적 총체들의 이론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66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자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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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르트르는 존재를 일원적인 측면에서, 일의적인 구도로써 현상학적 이론으로 귀결시켰다. 그에겐 존재의 나타남(인간적 실재의 현현), 즉 존재의 현상의 배후에 그 어떠한 초월적인 절대 요소는 존재치 않으며, 따라서 이러한 나타남의 도리란 단지 전적으로 존재자의 본질 즉 존재함에 의거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는 존재의 나타남을 ‘존재현상’이라는 추상명사로 축약하여 하나의 정리를 완성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나의 판단에 현상이란, 항시 영겁이 개개의 대상이 추동해나가는 ‘도출’의 힘이며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무라는 막이 유의 실재적/주관적 본질성을 가리더라도 ‘후설’이 말하는 “본질직관”의 힘은 영구히 대명사를 초월하여 비시간의 동시성을 보장할 것이다.

나는, 나의 스승 사르트르로 말미암아 그의 존재론이 필사하는 몰노마드적 총체성을 요해했다. 무릇, 사상에는 그 어떠한 비과학적인 ‘형이상학적 방법’이 사변이성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위험한 법이다. 이는 ‘독단론적인 창도’에 불과하며, 자연적 변연이 아닌 ‘시대에 국한한 일그러진 관념론’으로 환원될 따름이니까. 따라서 관념론에 ‘변증법적 방법’이 시행된 것은 극히 혁명적인 풍조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지적 움직임은 일종의 ‘포월’이다. 인간존재가 이성의 한계를 초극하고자 하는 노력이 고안해낸 최상의 ‘정신노동’이라 일컬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극점에는 유미주의의 실존적인 기생이 발본해있다. 유미주의란 어떤 의미에서는 탐미 즉 미학적인 퇴폐로의 이행이라 부를 수 있을 테니, 앞서 말한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성의 초월적 확장)’과 ‘자연을 영유하기 위한 시원에로의 탐구(유미주의의 영유)’의 치열한 대비는, 우리가 이 이분법적인 극단적 양자택일에 귀의할 경우 그것이 하나의 딜레마라는 ‘배리’에 함몰되지 않고 거의 병적으로 치닫는 ‘승려적 대오’에 진배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언제나 사영에 빠지면서도 ‘객관적인 실재’가, 즉 유물론에 대한 열렬한 지지의 형태로써 발원하는 자기 인식관의 명약관화함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판단착오이다. 우리가 ‘우주’라고 깨닫는 패러다임은 사실은 현대과학의 산물에 불과하다. 아니, 그 인식관이 고대 때부터 발본되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좀더 오관의 연산적인 확장에 몰입할 필연적인 ‘의미론의 생생함에서 근거하는 지적 열정’의 계시에 심취될지도 모른다. 단지 ‘이성’이라는 관념의 심판대도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이며, 신이 선택한 ‘종’이며 모든 만물의 왕이라는 오만함에 기인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형이상학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요컨대 파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가 보다 한층 넓은 의식지평을 생성하지 못한 채 자기 ‘존재의 존재’에 대한 기만으로 흘러가기 십상일 수도 있다. 물론 혹자는 나의 글이 앞서 제기한 ‘형이상학적 방법’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뒤편에서는 형이상학을 옹호하는 ‘자승자박’에 몰렸다고 비웃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태 껏 형이상학의 세계, 인간 조건의 피안, 불가지적 범주를 결코 부인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형이상학의 적극적인 옹호자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형이상학에 도달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방법’이 의미하는 것은, 전혀 논리학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히 언어유희에 경도되어 마치 ‘하이데거’식으로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주절거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지고의 논리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엄밀한 논리성으로 철두철미하게 이론적으로 인간존재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과학적으로 구명하는 걸 의미한다. 다시 말해, 헤겔이 자신의 사유에 변증법을 도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논리학적인 방법론을 구축해서 ‘선험적 관념’의 영역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아득히 먼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철학이 과학을 아우르는 분야였다. 그러한 게 분유되면서 ‘철학’이란 좀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으로, ‘과학’이란 좀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관점으로 이월되었다. 또한 근대에 이르러 철학이 여러 가지 분과로 나누어 지고, 과학 역시 그렇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 그 어떤 학자도 불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현대의 철학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모든 분과에 입각해야할 요인이 생긴 것이다. 이는 잔인할 정도로 세밀한 분과성을 극복하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 비전의 수립자로 거듭나는 ‘지고의 철학자’로서 ‘우주 전체’를 관통할 혁명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표상해야하는 학문에 대한 윤리학적 정초를 뚜렷이 절대자에게서 계시 받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터이다. 따라서 현대의 철학자들은, 그리고 철학자로 운임할 후학들은 평생의 시간을 ‘학문 일반’에 바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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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이성비판 1 - 실천적 총체들의 이론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65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자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사르트르는 존재를 일원적인 측면에서, 일의적인 구도로써 현상학적 이론으로 귀결시켰다. 그에겐 존재의 나타남(인간적 실재의 현현), 즉 존재의 현상의 배후에 그 어떠한 초월적인 절대 요소는 존재치 않으며, 따라서 이러한 나타남의 도리란 단지 전적으로 존재자의 본질 즉 존재함에 의거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는 존재의 나타남을 ‘존재현상’이라는 추상명사로 축약하여 하나의 정리를 완성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나의 판단에 현상이란, 항시 영겁이 개개의 대상이 추동해나가는 ‘도출’의 힘이며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무라는 막이 유의 실재적/주관적 본질성을 가리더라도 ‘후설’이 말하는 “본질직관”의 힘은 영구히 대명사를 초월하여 비시간의 동시성을 보장할 것이다.

나는, 나의 스승 사르트르로 말미암아 그의 존재론이 필사하는 몰노마드적 총체성을 요해했다. 무릇, 사상에는 그 어떠한 비과학적인 ‘형이상학적 방법’이 사변이성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위험한 법이다. 이는 ‘독단론적인 창도’에 불과하며, 자연적 변연이 아닌 ‘시대에 국한한 일그러진 관념론’으로 환원될 따름이니까. 따라서 관념론에 ‘변증법적 방법’이 시행된 것은 극히 혁명적인 풍조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지적 움직임은 일종의 ‘포월’이다. 인간존재가 이성의 한계를 초극하고자 하는 노력이 고안해낸 최상의 ‘정신노동’이라 일컬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극점에는 유미주의의 실존적인 기생이 발본해있다. 유미주의란 어떤 의미에서는 탐미 즉 미학적인 퇴폐로의 이행이라 부를 수 있을 테니, 앞서 말한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성의 초월적 확장)’과 ‘자연을 영유하기 위한 시원에로의 탐구(유미주의의 영유)’의 치열한 대비는, 우리가 이 이분법적인 극단적 양자택일에 귀의할 경우 그것이 하나의 딜레마라는 ‘배리’에 함몰되지 않고 거의 병적으로 치닫는 ‘승려적 대오’에 진배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언제나 사영에 빠지면서도 ‘객관적인 실재’가, 즉 유물론에 대한 열렬한 지지의 형태로써 발원하는 자기 인식관의 명약관화함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판단착오이다. 우리가 ‘우주’라고 깨닫는 패러다임은 사실은 현대과학의 산물에 불과하다. 아니, 그 인식관이 고대 때부터 발본되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좀더 오관의 연산적인 확장에 몰입할 필연적인 ‘의미론의 생생함에서 근거하는 지적 열정’의 계시에 심취될지도 모른다. 단지 ‘이성’이라는 관념의 심판대도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이며, 신이 선택한 ‘종’이며 모든 만물의 왕이라는 오만함에 기인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형이상학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요컨대 파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가 보다 한층 넓은 의식지평을 생성하지 못한 채 자기 ‘존재의 존재’에 대한 기만으로 흘러가기 십상일 수도 있다. 물론 혹자는 나의 글이 앞서 제기한 ‘형이상학적 방법’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뒤편에서는 형이상학을 옹호하는 ‘자승자박’에 몰렸다고 비웃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태 껏 형이상학의 세계, 인간 조건의 피안, 불가지적 범주를 결코 부인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형이상학의 적극적인 옹호자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형이상학에 도달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방법’이 의미하는 것은, 전혀 논리학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히 언어유희에 경도되어 마치 ‘하이데거’식으로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주절거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지고의 논리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엄밀한 논리성으로 철두철미하게 이론적으로 인간존재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과학적으로 구명하는 걸 의미한다. 다시 말해, 헤겔이 자신의 사유에 변증법을 도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논리학적인 방법론을 구축해서 ‘선험적 관념’의 영역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아득히 먼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철학이 과학을 아우르는 분야였다. 그러한 게 분유되면서 ‘철학’이란 좀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으로, ‘과학’이란 좀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관점으로 이월되었다. 또한 근대에 이르러 철학이 여러 가지 분과로 나누어 지고, 과학 역시 그렇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 그 어떤 학자도 불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현대의 철학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모든 분과에 입각해야할 요인이 생긴 것이다. 이는 잔인할 정도로 세밀한 분과성을 극복하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 비전의 수립자로 거듭나는 ‘지고의 철학자’로서 ‘우주 전체’를 관통할 혁명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표상해야하는 학문에 대한 윤리학적 정초를 뚜렷이 절대자에게서 계시 받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터이다. 따라서 현대의 철학자들은, 그리고 철학자로 운임할 후학들은 평생의 시간을 ‘학문 일반’에 바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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