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초고는 마치 다이아몬드를 다듬듯 섬세하게 다듬었습니다. 비록 장편소설의 서막이지만, 본 소설은 투고에 사용되는 만큼 스크랩의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많은 네티즌 분들의 냉철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대입은 천천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늦은 만큼 서두를 필요는 없겠고, 오히려 큰 그릇을 만들 듯 천천히 완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1. 類比
장엄했던 삶의 마무리는 정신병자라는 도착적 과정에서 가련하게 도출되었다. 슬픔은 무리를 따라, 밑도 끝도 없는 아스라한 연역을 따라 마침내는 지리멸렬한 환멸로 귀결되었다.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고, 과거를 따라, 그 극점을 따라 여행했던 도착지는, 바로 윤리와 계급도덕의 한계를 거스르는 순수의 영역, 거대담론의 종언적 지점, 따라서 인류보편을 지향하는 시時의 피안이자 개인의 인식과 오관을, 거기에 딸려오는 ‘사고의 공전’을 극복한, ‘초절적인 불가지론의 환영’이었고, 그 그림자가 나타내는 ‘지고의 진선미’였다.
그렇지만 현실이 내게 직사하는 건, 나라는 주체가, 그리고 내가 동고하는 타자들이 외계에 입문해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러한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는 점, 즉 부르주아 지상주의 그리고 이와 무관하지 않은 현실이란 ‘초자본주의’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강령에 동감하여, 나는 대악大惡이 정점에 달한 시대에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다른 이들을 구원함으로써, 그들의 미소 속에서 나의 미래를 찾아야했다. 나는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깊은 휴머니즘적 사고방식만이, 마르크시즘-레닌이즘만이, 부르주아라는 ‘마왕’을 배격하는 일만이, 자본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만이, 부처와 예수의 뜻에 따르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방법론’이라는 걸 안 것이다.
현대는 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 이용당하는 사회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모든 건 자본주의가 잉태했고, 악의 시원은 곧 자본의 맹아에 진배없다. 진짜 악인들은 상류층이고 그들이 체제를 선포하고 모두를 이용해먹는다. 악인은 몇 푼의 돈으로 인해 그 선의 이면이 귀신으로 변모한다. 오늘날의 악은 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필경 희생양들을 ‘재앙’처럼 번식시킨다.
오류, 오류의 파편들이 다시금 파편을 재생산하는 병적인 시대, 그 가운데 나는 이런 현실적인 따라서 ‘합리적이고 더러운’ 층차에서 벗어나는, 즉 시대를 표류치 않는 생득적인 ‘본질직관’의 아우라Aura를 표본으로, 형이상 층위에서, 조형적인 문예도상의 거점에서, 기형적인 ‘절대초극’의 연쇄적 연역을 따라, 이 질주의 몰입을 완벽히 방조한 나 자신에 환멸하며, 구체적 음영이 드리우는 조소의 반영을, 희끄무레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불현듯 죽어가면서 깨달은 사실은, 내가 살아보고자 하는 건 논리가 아니라, 미의 정수를 밝히는 영원불멸의 자각인 것이었다. 나는 낭만주의만이, 현실이라는 더러운 정치학적 세계를 잊고, 인간의 이해 타산적 인식관의 인과관계성을 타파할 유일한 ‘시뮬라크르’라는 걸 알았다. 어떤 의미에서 시뮬라크르는 ‘이데아’를 초월하기도 하므로.
내게 삶은 전체적인 환멸에로의 탁마였고, 진귀한 유년시절이라는 시원은 끝없는 통속으로 인해, 완전하게 분쇄되었으며, 언제나 절필을 선언했지만, 결국 내가 택한 건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지나감으로써의 글쓰기였고, 내게 이런 괴로운 도정의 응시는 지고의 개인주의를 지향한다는 데서 오는 자족감으로부터 발본된, ‘한 편의 철학적 서사시의 필사’의 감미로운 알레고리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모든 정태적인 마감에는 ‘한없이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뒤따랐을 뿐이었다.
나는 살아가기보다는 선택하고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는 관념의 ‘부정변증법’의 세속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 생은, ‘기억의 집합’에서 나아가야하는 ‘비전의 개시’, 양자 사이의 모색이 모종의 정신분열증이라는 왜곡된 격률로서 다가올 뿐이어서, 요컨대 나는 정합성의 세계가 아닌 모순의 세계에서 실존의 구체적인 섬광을 찾아 해매는, 한 마리의 황야를 떠도는 늙은 이리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당당히 소급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을뿐더러, 대놓고 나의 지성을 과시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불안이 아니라 안정에서 비로소 영감을 구명해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간절히 소원한다. 내 추억, 내 변모의 정체적 과정이, 내겐 한없는 불안과 불면의 밤의 미로라는 공간 안에 의거해서, 그 영광스런 패배의 족쇄에서 어떤 목적론적 의식에 집착하지도 않고, 한때 내가 미묘하게 빠져들었던 종교와도 흡사했던 군국주의적 쇼비니즘과 아직까지 내 ‘사상적 유영’의 근간을 이루는, 오늘날에도 생생한 마르크스주의를 잠시 제쳐두고, 지금은 단지 ‘선험적 형이상학의 담론’이라는 광풍의 한가운데에 고考하여, 지조 없는 지성의 소용돌이의 현현顯現 아래서, 대오와도 같은 간지의 역광을 마주보며, 따라서 하나의 ‘기하학적 정신’의 버팀목 위에서, 그리고 살아간다는 사고방식의 선형적 둘러싸임에서, 결과적으로 이 사차원적 시차에서 어지러이 방황했을 뿐이었기를.
나는 다만 나의 ‘기투’가 어긋난 그것이 아니기를, 역사 이래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신에게, 단아한 몸가짐으로 기도드렸을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고, 그 믿음을 내 학자로서의, 인생이라는 이름의 광시곡으로, 은은히 외양 세계라는 풍경에 울리고 싶을 뿐이다.
달은 아득히 세계의 비애를 표양한다. ‘인간존재’이기에 주어진 슬픔의 무게는, 그 진중함의 역설을 상기하며,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온전하기를 노래했다. 아니 그들이 나처럼 비극적인 존재로 굳어지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차라리 내가 ‘영원한 환멸의 환상’을 부여받음으로써, 세상이 눈雪과 같은 순정으로 변용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존재를 구성하는 의식의 시간성을 좀먹는다는 게 오직 자신의 속물주의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모르는 속인들은 시대의 아들을 자처하고 나설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제자리걸음에 불과함이, 서글퍼진다.
이지러진 달이 그처럼 교교한 자태를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고매한 사유를 받듦으로써 외부적 현실성을 초절했기 때문인 것을. 오로지 고귀하고 심원한 정신만이, 피투와 기투를 일원화시킴을 그들은 모른다. 무릇 ‘표리일체’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렇지만 많은 인간들은 나의 한 측면만을 보고, 모종의 정언적 판단을 내린다. 즉 나의 피투가 ‘아웃사이더’의 전형이라고, 그러니까 그들은 나를 ‘골방폐인’이라고 비방하고, 이 사회에 있어서 하등 쓸모없는 일종의 미치광이, 비주류의 범주를 떠도는 가련한 망령이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는 항진명제가 아닐 수 없고, 그들은 정당하다. 나는 졸렬한 모리배의 무리와 동류가 아니라고 호소한다 치더라도 그들은 나를 외면할 것이고, 이는, 최소한 이 영역까지는 나를 이해하는 ‘적절한 패러다임’이라고 감히 부정하지 못하겠다. 여기까지는 그들이 근거 있는 실증주의 과학에 입각한 자명한 해석을 내린 과감한 지향성을, 그들의 이성의 심판대에 나라는 죄인을 세운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지향성을, 내가 부정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별 헤는 밤’이 오면, 포효하는 별들이 검은 하늘을 밝힐 것이고, 그 찬란한 우주의 시현에 나는 지금껏 써왔던 내 개인의 역사가, 내가 흐느끼며 써왔던 ‘눈물방울 아린 연약한 시’들이, 내가 아파왔던 과정이 의미하는 고매한 이데아가 옳다고, 내 정신의 다재다능함과 종횡무진 내달리는 총체성만은, 그것만은 믿어달라고…, 나는 침묵의 ‘진중성’과 ‘불침투성’의 어지러운 뒤범벅과 함께, 마치 이미 고색창연해져서 빛바랜 고대의 시들을 읊는 것과도 같이, 하나의 해명과 비스무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릴 것이리라.
지나감, 지나감, 오직 그것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하는, 어떤 초월적인 개별자임을 자처하게 하는 확정적인 취미는, 경향은 존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우리가 우리이게 금하는 자기동일성의 공시적 파노라마의 펼쳐짐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순간적인 나타남에 의지하는 현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이라는 흐름, 개별자로서의 역사라는 흐름에서 주체성을 되찾고, 과거도 현재도 아닌 오직 미래를 향해 변용해나가는 대자존재로 현전할 때, 그 기투의 복잡다기한 변증법은 비로소 의미의 시현이 당도한다는 명확성을 재단케 하리라.
박명은 요원하고, 양주의 새벽은 장마의 이슬에 맺혀, 묵묵히 허공에 쓸쓸함을 흩뿌린다. 유년기에 그 정초적 출발점을 둔 ‘생에 대한 관조’는 저절로, 일체의 ‘사영斜影’을 나의 의식 속에 ‘패배적인 비약과 고무’라는 부정의 먹물로써 떨어드린다. 모든 것이 신의 영역 저변으로 미끄러진다.
이윽고, 나는 나라는 분열적 영혼에 ‘신사적인 동의’를 구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