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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이성비판 3 - 실천적 총체들의 이론 ㅣ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6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자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사르트르는 존재를 일원적인 측면에서, 일의적인 구도로써 현상학적 이론으로 귀결시켰다. 그에겐 존재의 나타남(인간적 실재의 현현), 즉 존재의 현상의 배후에 그 어떠한 초월적인 절대 요소는 존재치 않으며, 따라서 이러한 나타남의 도리란 단지 전적으로 존재자의 본질 즉 존재함에 의거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는 존재의 나타남을 ‘존재현상’이라는 추상명사로 축약하여 하나의 정리를 완성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나의 판단에 현상이란, 항시 영겁이 개개의 대상이 추동해나가는 ‘도출’의 힘이며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무라는 막이 유의 실재적/주관적 본질성을 가리더라도 ‘후설’이 말하는 “본질직관”의 힘은 영구히 대명사를 초월하여 비시간의 동시성을 보장할 것이다.
나는, 나의 스승 사르트르로 말미암아 그의 존재론이 필사하는 몰노마드적 총체성을 요해했다. 무릇, 사상에는 그 어떠한 비과학적인 ‘형이상학적 방법’이 사변이성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위험한 법이다. 이는 ‘독단론적인 창도’에 불과하며, 자연적 변연이 아닌 ‘시대에 국한한 일그러진 관념론’으로 환원될 따름이니까. 따라서 관념론에 ‘변증법적 방법’이 시행된 것은 극히 혁명적인 풍조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지적 움직임은 일종의 ‘포월’이다. 인간존재가 이성의 한계를 초극하고자 하는 노력이 고안해낸 최상의 ‘정신노동’이라 일컬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극점에는 유미주의의 실존적인 기생이 발본해있다. 유미주의란 어떤 의미에서는 탐미 즉 미학적인 퇴폐로의 이행이라 부를 수 있을 테니, 앞서 말한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성의 초월적 확장)’과 ‘자연을 영유하기 위한 시원에로의 탐구(유미주의의 영유)’의 치열한 대비는, 우리가 이 이분법적인 극단적 양자택일에 귀의할 경우 그것이 하나의 딜레마라는 ‘배리’에 함몰되지 않고 거의 병적으로 치닫는 ‘승려적 대오’에 진배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언제나 사영에 빠지면서도 ‘객관적인 실재’가, 즉 유물론에 대한 열렬한 지지의 형태로써 발원하는 자기 인식관의 명약관화함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판단착오이다. 우리가 ‘우주’라고 깨닫는 패러다임은 사실은 현대과학의 산물에 불과하다. 아니, 그 인식관이 고대 때부터 발본되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좀더 오관의 연산적인 확장에 몰입할 필연적인 ‘의미론의 생생함에서 근거하는 지적 열정’의 계시에 심취될지도 모른다. 단지 ‘이성’이라는 관념의 심판대도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이며, 신이 선택한 ‘종’이며 모든 만물의 왕이라는 오만함에 기인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형이상학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요컨대 파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가 보다 한층 넓은 의식지평을 생성하지 못한 채 자기 ‘존재의 존재’에 대한 기만으로 흘러가기 십상일 수도 있다. 물론 혹자는 나의 글이 앞서 제기한 ‘형이상학적 방법’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뒤편에서는 형이상학을 옹호하는 ‘자승자박’에 몰렸다고 비웃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태 껏 형이상학의 세계, 인간 조건의 피안, 불가지적 범주를 결코 부인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형이상학의 적극적인 옹호자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형이상학에 도달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방법’이 의미하는 것은, 전혀 논리학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히 언어유희에 경도되어 마치 ‘하이데거’식으로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주절거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지고의 논리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엄밀한 논리성으로 철두철미하게 이론적으로 인간존재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과학적으로 구명하는 걸 의미한다. 다시 말해, 헤겔이 자신의 사유에 변증법을 도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논리학적인 방법론을 구축해서 ‘선험적 관념’의 영역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아득히 먼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철학이 과학을 아우르는 분야였다. 그러한 게 분유되면서 ‘철학’이란 좀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으로, ‘과학’이란 좀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관점으로 이월되었다. 또한 근대에 이르러 철학이 여러 가지 분과로 나누어 지고, 과학 역시 그렇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 그 어떤 학자도 불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현대의 철학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모든 분과에 입각해야할 요인이 생긴 것이다. 이는 잔인할 정도로 세밀한 분과성을 극복하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 비전의 수립자로 거듭나는 ‘지고의 철학자’로서 ‘우주 전체’를 관통할 혁명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표상해야하는 학문에 대한 윤리학적 정초를 뚜렷이 절대자에게서 계시 받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터이다. 따라서 현대의 철학자들은, 그리고 철학자로 운임할 후학들은 평생의 시간을 ‘학문 일반’에 바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