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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이르는 병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어떤 것이든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애초에 입소문이 좋다고 나 역시 좋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 그런 기대가 없었는데도 영 개운치 않다. 충격적인 결말, 마지막 한 페이지로 모든 게 무너져 내린다는데... 이를 어쩌나. 미안하다, 안 속아서. 읽으면서 '설득력 없는 부분이 종종 보이지만 아무래도 범인 미노루가 ~가 아니고 ~ 것, 설마 그게 충격적인 결말이야?' 라고 예상한 게 그대로 맞았기 때문에 제대로 김이 새버렸다. 읽기 괴롭고, 혐오스러워서 그냥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부분들을 그나마 결말에 대한 기대로 꾹 참고 견뎌왔는데 허탈한 기분이다. 서평이야 주관적이니 그렇다 치고, 과대광고는 믿으면 안된다는 절대진리를 다시 실감했다.
범행이 워낙 악질적이고 끔찍한 것도 불쾌하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소름끼치고 혐오스러운 건 등장인물 개개인이 드러내는 극심한 이기주의였다. 내 가족이 무고한 사람들을 끔찍하게 해치면서도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정도가 심각한 미*놈이자 극악무도한 범죄자인데도, 내 가정만 풍지박산 나지 않게 지키면 장땡이란 말인가? (사실 지킬 수나 있나? 겉으로만 멀쩡하게 보일 뿐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진 상태인데) 범인이야 정상 범주에서 100만광년은 벗어난 듯한 미*놈이니 아예 접어둔다고 해도, 마사코의 생각과 기이한 행각들은 정말 소름끼치고 역겨웠다. 가엾은 피해자와 그 유족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다. 적어도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에 대한 죄스러움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게 먼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지경에서도 내가, 내 가정이 우선일 수 있을까? 게다가 애정이란 이름 아래 행한 행동이라도, 도를 지나친 자식에 대한 관심 역시 이 여자도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강하게 만들었다. 내 자식이라도 누군가의 자식이기 이전에 엄연히 독자적인 하나의 인격체이다. 매일같이 아들의 방안을 샅샅이 뒤지다 못해 쓰레기통까지 헤집는 이런 어머니라면, 애가 엇나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무관심도 애를 망치지만, 도를 지나친 관심과 애정도 애를 망가뜨린다. 남편이 자식들에게, 아니 가정 자체에 아무리 무심하고 시큰둥해도 그렇지 어떻게... 남편이나 부인이나 부모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언니 것이라면 뭐든 탐내고 빼앗았다가 막상 제 것이 되면 훌쩍 버리는 가오루의 이기심도 불쾌하긴 매한가지. 유아적인 잔인함이 성인이 된 이후까지 그대로 남아있는데, 왜 이런 성향이 나타나게 된 것인지는 소설에서 드러나지도 않는다. 비뚤어지더라도 언니쪽이 비뚤어지는 게 더 설득력 있는 상황인데, 제대로 다루지도 않을 그녀의 비틀림을 굳이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범인만으로도 뒤틀린 인간상은 충분한 것 같은데 그의 가족인 마사코는 설득력이 있어도, 가오루까지 이런 식으로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시대의 병리적 징후에 잠식된 가정을 발단으로 벌어진 끔찍한 비극을 다루려면, 범인과 그 가정에만 집중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데. 도시코의 불행의 근원에 가오루의 비뚤어짐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편애와 잘 맞지 않는 남편과의 이혼으로 충분했을테니. 가오루의 이기심은 없어도 되는 과한 설정이라는 생각를 버릴 수가 없다.
소설작품으로서 시대성이나 사회성과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본격 작품으로서도 탁월하다고 아무리 작품 해설에서 칭송해도 미안하다, 그 역시 별로 공감 못하겠다. 범행이 극악으로 잔인하고 끔찍해서도, 등장인물들이 불쾌하고 거부감이 들어서도 아니다. 도를 약간 넘어서긴 했지만, (하드고어물은 보지 않음에도) 대충은 예상치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술술 읽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소설로서의 재미는 있다. 극찬은 못해도 잘 쓰여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작가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넣었음이 분명한 설정들이 도를 넘어선 전개로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해서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너무 일을 크게 벌여서 수습을 못했구나 싶다고 할까. 좀 더 치밀하게 구성해서 설득력을 확보하거나 판을 적절히 벌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드하다는 걸 감수할 수 있다면, 읽어볼만은 하지만 강추를 날릴만큼은 아니다. 뒤늦게 확인한 무수한 호평들을 보니 이런 평을 올려도 될지 (나름 소심한지라) 걱정스럽긴 하지만, 이런 의견도 있다는 것이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아무리 동안에, 미남이어도 마흔 넘은 아저씨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일 리가 없다. 죽어라 의학적인 관리를 했다 해도 이 정도까지 나이를 속일 수가 없다. 그런데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는 집어넣었을까, 독자를 확실히 낚기 위해서? 낚이지 않은 나같은 독자는 그저 실소만 나온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