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훔친 남자
후안 호세 미야스 지음, 고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읽으면서, 최근의 상태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중단하지 않았다. 아무리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이라도, 일단 읽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끝을 봐야한다는 이상한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으면, 굳이 리뷰를 남길 이유는 없다. 미련한 오기 따위 필요없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주제를 부각시키는 요소들이 좋았고, 주인공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불안한 한편 흥미롭기도 했다. 이제껏 읽어온 (표본이 현저하게 작아 편견에 불과하겠지만) 스페인 문화권 소설들에서 만나지 못했던 작가의 독특한 문체도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한껏 몰입해 끝으로 내달았다.

 마누엘이 자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욕망에 따라 그림자를 훔칠 때부터... 마침내는 그 그림자에 자발적으로 먹히고 말 것을 예상했는데, 그럼에도 입안이 바싹 마른다. 머리로 한 예상과는 달리 그 그림자가 마누엘에게 긍정적인 자극으로 작용하길 바랐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이렇게도 마누엘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을까? 무너지고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놀랍도록 빠르고 담담하게 수용하는 그의 모습은 안타까운 것을 넘어서 오싹하다. 어느 한 구석의 결핍쯤이야 누구인들 가지고 있는 것인데, 어째서 이런 상황과 마주해야 했을까... 막다른 상황에서 내린 그의 결정이 더없이 자발적이라, 큰 굴곡없이 서술해나가는 작가의 담담함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담백함이 이 소설의 맛을 한층 더 끌어냈음은 자명하다. 

 길지 않은 분량이라 자칫 소설 속의 장치들이 군더더기로 느껴질 수도 있었는데, 주제 부각에 더해 이 영화와 동화가 실제로 있길 바랄만큼 작가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제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요리사의 솜씨가 따라주지 않으면 맛깔스런 음식이 되기 어려운 법, 내공이 만만치 않은 작가와의 우연한 만남처럼 기쁘고 들뜨는 일도 없다, 고로 이건 횡재다. 다만 검색해보니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이 책 하나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 이런 재능과 문체를 가진 작가의 책을 더 만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 갈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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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제목에 적은대로 '억세게 재수없는 남자의 이야기' 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주인공은 인복은 있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힘없고 비루한 소시민이 어쩌다 한번 튄(?) 관계로 희생양으로 간택, 영문도 모르고 배배 꼬인 꽈배기 인생이 되고 말았지만. 아니, 이 경우에는 아무리 인복이 따라도 처절하게 재수없는 사람일 뿐인 걸까.

 이사카 고타로의 책은 '사막',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에 이어 3권 째인데, 이제 어느 정도 그의 매력을 알 것 같다. 남들 다 읽을 때 같이 읽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라 뒷북을 치고 있지만. 한때 국내에서 '온다 리쿠'에 뒤지지 않는 '이사카 고타로' 열풍이 불었다고 알고 있는데, 뒤늦게나마 왜 그랬는지 납득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의 소설에 따르는 비판도, 열광도 3권쯤 읽고 나니 이해가 간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이사카 고타로의 매력은, 비현실적인 요소를 현실적인 요소 안에 적절한 수위로 잘 버무려낸다는 것과 별다른 의미 없어 보이는 문장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이 책의 경우에 크게 작용한 것은 후자. '그럴 줄 알았어'와 '치한은 죽어라'라니. 달랑 한 줄 읽으면 뭔 소리야 싶은 말인데, 어쩌면 그리 적재적소에 잘 갖다놓았는지 감탄스러울 따름. 말이라는 것이 원래 쓰이는 상황에 따라 어떻게 전달되는지 천차만별이라지만 '그럴 줄 알았어'가 그렇게 따뜻한 말이 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치한은 원래 나쁜 놈이지만, 실소가 절로 나오는 '치한은 죽어라'라는 말에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것도.

 허구이게 마련인 소설이라 해도, 그것도 일반인으로서는 진실 여부를 가리기 힘든 SF 장르라 해도, 현실성이 떨어지면 매력이 반감되기 마련이다. 과하지 않나 싶은 비일상적인 인물이나 상황의 등장은 분명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 그렇지만 작가가 스스로의 의도대로 그 일상적이지 않음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재미를 추구한 소설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낸다면, 그다지 내키지 않는 설정이라도 수용할 수 있다. 머리를 식히려고 편하게 고른 책이었는데, 글은 역시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절대불명의 진리를 새삼 실감했다. 앞으로 입소문이 많이 난 이사카 고타로의 책은 외면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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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6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볕 속의 사람들 창비교양문고 41
가싼 카나파니 / 창비 / 1996년 7월
절판


누구든간에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잘못은, 단 한순간이라도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과 실수가 자신에게 그들을 희생시키고 존재해도 좋다는 권리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정당화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일세.-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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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 2010-06-0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악행이 또다시 이슈가 된 시기에 읽어서인지...
두껍지도 크지도 않은 한 권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인단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6월
구판절판


"뒷문으로 도망치게 하면 불행이 기다리고 있어. 비극은 뒷문에서 일어난다고."-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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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리처드 예이츠 지음, 유정화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2월
절판


<... 절대적으로 정직하고 절대적으로 진실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반드시 홀로 처리해야 한다... >-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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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6-08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보다 책이 더 좋아요?
그렇다면 저도 읽어볼래요.

Kir 2010-06-08 12:07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가슴은 더 아프고 무거워요...
영화를 보고 짐작했던 것보다, 에이프릴의 상처는 훨씬 크고 깊더라구요. 뒤늦게나마 그녀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게 됐어요. 안타까웠던 프랭크의 미성숙함도 그 정도가 더 한 것 같구요. 참 가련한 캐릭터구나 싶어요. 에이프릴에 대한 안스러움과는 종류가 다르지만요.

꽤 긴 시간동안 잊혀졌던 작품이라는 게 아쉽네요.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은데, 국내에 출간이 될런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