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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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로 가제본 상태의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완성본이 궁금해 간 서점에서 심완선 작가의 후기/서평을 읽고는 1.5배쯤 더 좋아졌다:)

작가 중 하나라도 좋아한다면, 또는 아무도 모르더라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아래는 인스타에 가제본 이벤트로 올렸던 글이다. (책 말미에 수록된 정식 서평과 비교하려니 이렇게 조악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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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는 과정은 거의 언제나 다른 작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가장 흔한 경로는 다양한 작가의 글을 엮어 낸 모음집이다. 좋아하는 글을 통해 다른 글을 좋아하게 되는 곳. 이번 여정의 계기가 된 이름은 연여름이다. 작년 <리시안셔스>를 시작으로 사랑하게 된 이름이다. 하지만 곽재식-구병모-천선란 또한 좋아하는, 알고 있는 이름들이다. 문학과지성사의 -보다 시리즈 역시 그러하다.

결국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을 것이다.

1.

아는 작가의 글을 보면 아, 이 작가의 글은 이렇지, 싶은 때가 많은데 곽재식 작가의 글이 대개 그렇다. <얼어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 공기업 또는 공적 기관 또는 공적 업무의 사주를 받는 조직의 일원이고, 대개 이런 주인공이 그러듯 어처구니없는 사내정치에 휘말려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대체로 이런 글을 읽을 때면 순문학과 sf의 장르적 경계는 문맥을 해독하는 독자의 마음에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 얼음 땡! 외쳐야 할 것 같은 이야기.

비슷하지만 다르게, 구병모의 글의 dna는 소재보다는 문장과 이미지로 발현한다. <채빙>의 나는 냉동인간으로, 해동되지 못한 채 바깥을 주시하는 수동적인 입장이다. 그 상태로 나는 나름대로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판단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외부에서 정의되는 '나'이기에 모든 희비극은 내 안에서만 시작하고 수렴한다. 얼음 속 무언가 조용히 들끓는 듯한 이야기.

남유하는 내게 새로운 작가인데, 나는 그를 사랑하는 이의 시체를 먹는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맞선과 달리 합의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매번 신기하고 조금은 당황스러운 것이다. <얼음을 씹다>는 서늘하지만 서글프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고드름을 닮은 어린아이의 손가락을 부수어 씹는 허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귓속의 세입자>는 말 그대로 귀에 잠시 들어와 사는 외계생명체를 반사판 삼아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내용이다. 이런 쪽의 소재를 보면 언제나 메이어의 <더 호스트>가 떠오르는데, 이번에는 특히 더 그랬다. 이런, 인간이라는 종의 온기와 열정, 치열함을 특정짓는 글을 볼 때마다 더욱 치열하고 열정적이며 온도 높은 생명체를 상상한다. 세입자의 종족이 붙어 살던 시절이, 한기가 아닌 온기를 추구하던 때가 궁금했다. 미지근한 물 같은 이야기.

연여름의 <차가운 파수꾼>은 가장 좋았던 이야기. 짧은 이야기 속 피어나고 퇴장하는 등장인물을 아끼기란 힘든 일인데, 이제트와 노이와 선샤인은 단편의 구성물이 아니라 각자의 사고와 서사가 있는 존재라 마음이 간다. 뜨거운 여름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생각하고 회의하고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 연여름의 등장인물은 글 몇 줄을 통해 내 마음에서 사람이 된다. 난 이 작가가 정말로 좋다.

모음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천선란의 <운조를 위한>으로, 운조는 낮에는 소를 죽이고 밤에는 고양이를 얼리는 수의사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수의사가 되기 위한 기본요건일까 탈락 요소일까. 수의사가 아닌 입장에서야 당연히 전자지만. (객관적이지 않은 의견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마음으로 저주하고자 하는 수의사가 있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죽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차갑지 못한 마음은 녹아서 흩어진다.

2.

꾸밈 없이 하얗고 밋밋한 가제본이라 좋았다. 잔인하거나 담담하거나 슬프거나 올곧은 이야기들은 얼음 같기도, 물 같기도, 빙하 아래 아래 아래에도 흐르는 마그마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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