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 시인선 552
백은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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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빨간 표지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경고가 되지 않았을까.
비겁한가.


1.
창작물을 제대로 감상하는 유일한 방법은 동조라고 생각한다.
무엇 또는 누구와 동조하는지는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중요한 건 시선을 나 아닌 무언가와 일치시키는 것. 함께 웃고 울고 무덤덤했다가 화를 내고……

슬픈 글을 잘 읽는다. 잘 동조한다. 그건 내가 요새 슬픈 사람이라서 그렇겠지. 슬프다 슬프다 외면, 내 이야기 같은 것들.

화를 내는 글을 읽으면 미안해진다. 나는 슬퍼하고 싶은데, 너는 화가 났구나. 미안해. 미안. 거기까진 함께 가지 못하겠어.


2.
시인은 많은 것을 말한다.
분노에 대해서만 말하지는 않지만, 계속 분노하고 있다.
극적이고 화려한 화.
그 순간 나는 피하고 싶어진다.

욕하는 건 싫다. 아니, 무섭다. 아니, 부럽다.
나는 욕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야. 그래서 화내지 않기로 했어. 싸울 자신이 없어서. 그러니 화를 내는 사람은 무섭고, 싸우는 사람은 부러운 거야.

시집을 읽어가며 내 마음과 시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내 탓이다.
나는 열심히, 의식적으로, 공감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는 무대 위를 구경하며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다. 객석을 떠나지 않는 박수치지 않는 관객은, 무례하지.

나는 왜 이토록 분노를 거부하는가.
함께 싸우지 못하는가.


3.
255쪽에 달하는 - 나머지는 해설이다 - 묵직한 시집이다.
긴 시가 많다. 반복적으로, 연속적으로 확장되는 이미지를 곰씹다 보면 장편소설을 읽는 듯한 충족감이 생긴다. 시인은 반복적으로 과거를 파헤치고 현실로 끌어와 부딪친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두지 않는다. 처절하거나 비장하거나 고요한, '요동치는 파도 속 비명의 숲'(p.148)이다.

나는 모든 비명은 밖으로 뻗은 손길이라 믿고
나는 이 시집이 너무 힘들다.



이해할 수 있니 세계가 하나의 작은 성냥갑이라는 걸
긋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딱딱한 어둠에 불과하다는 걸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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