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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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사람이 다 재앙과 관련되어 있었다.”(p.217)

재난 영화를 즐기는 심리는 무엇일까.
외계인이 쳐들어오든
빙하기가 다시 찾아오든
지구 맨틀이 폭발하든
위기 속에서 더욱 강해지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답을 찾고 재난을 끝낸다.

관객은 그저 푹신한 의자에서 스크린과 거리를 두며
자신이 속한 현실세계의 안온함을 확인하고
이웃에 사는 히어로들의 선의에 안도하며
재난을 소비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재난 영화 속에서 나온 것 같은 장면들이 뉴스에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 고통받는 도시 1순위인)
뉴욕 센트럴파크에 야전병동이 설치되고
타임스스퀘어 광장은 텅 비었으며
시신을 집단으로 매장한다.

엄청난 cg가 동반된 사건은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람들은 재난이 스크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실재할 수 있고
한 번 터진 재난은 영화 속의 근사한 시나리오처럼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2.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p.194)

이러한 재난 속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카뮈는 잊혀진 줄 알았던 전염병 페스트로 인하여 봉쇄된 도시, 오랑의 시민들을 통하여
죽음이라는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뮈라는 작가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의외로 관습적이라고 느껴진다.

도시는 피로와 절망, 권태로 가득하지만
시민들의 고통은 주로 추상적이고 익명으로 가려진 형태로 발생한다.

이러한 고통의 묘사는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며 주위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의사 리외를 비롯한 몇몇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은” 등장인물들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영웅적인 성품을 지닌 주인공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연대하여 재난을 극복’하는
익숙한 재난영화의 작법이자,
페스트라는 재난이 카뮈 특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기 위한
특수한 배경으로 소모된다는 느낌도 준다.

오히려 아카데미 레드카펫마냥 화려한 앙상블을 구성해두고
기네스 펠트로를 10분만에 죽여버리는
<컨테이젼>의 구성이 훨씬 현실반영적이라고 할까.

영화 속 세상은 특별한 음모를 꾸미는 세력도
위기를 극복하려는 구심점도 없이 그저 바이러스에 점령당한다.
(역시 유명배우들인) 몇 사람은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대다수 무명인들이 할 수 있는 행위는 그저 살기 위해 누군가를 피하는 것뿐이다.

3. “인간들은 언제나 똑같았다.”(p.360)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래한 재난은
인류가 성취해 온 문명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에 놓여 있는지,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일상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 것인지,
무능함과 무기력이 얼마나 순식간에 사회를 잠식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역병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오늘 닥친 불행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봉쇄가 풀린 오랑의 시민들마냥 환호할 날이 올 것이다.

상영시간 내내 건조한 다큐멘터리처럼 현실감 있게 공포를 전달하던 <컨테이젼>도
마지막 씬에서는 전염병의 첫날 무슨 일이 있었으며,
어떻게 전파가 되었는지를 관객들에게 확인시켜준다.

원인도 경로도 알 수 없는 스릴러에 짓눌렸던 관객도
그나마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며 영화관을 나올 수 있는 결말이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결말은 어떨까.
인수공통 감염병을 초래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는 돌이킬 수 없고
판데믹의 주기는 빨라져만 간다.

인류가 이 사태를 통해 무언가를 깨우치고
사전에 방비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이미 지구에 너무 많이 존재하며
모든 종의 생태계를 침범하고 있는 인류는
바이러스가 서식지를 찾아 떠날 최상의 신대륙이다.

언젠가 있을 '코로나 극복'이라는 환희의 외침이 무색하게
자연은 다음 번 공격을 준비할 것이다.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페스트균'처럼
'변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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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기간의 경기 불황과 소비 위축, 온라인으로 급변하는 시장 상황 속에서 고객에게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츠타야서점을 기획, 성공시킨
마스다 무네아키의 경영철학책.
2015년에 출간되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오늘날의 불황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이 담겨있다.

2. 시장이란 나의 상품과 남의 돈이 교환되는 공간이다.
종래의 비즈니스는 그 교환을 효율적으로 하게 해주는 것인데
‘지적자본을 바탕으로 고객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제안이 가능하다면
효율성을 넘어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주요논지.

3. 그러한 포스트 자본주의를 위하여
‘누구나 자기 인생의 디자이너, 즉 기획자가 되어
사명감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저자의 제안은 마치 이 시대의 산상수훈처럼 들려온다.

<부의 추월차선>이나 <나는 4시간만 일한다> 같은
서구의 기업가정신을 강조한 책보다 훨씬 간결하고 정제된 울림을 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론, 의미론이라 할까.

4.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를 규정한다.
그저 살아져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고 싶다면
내가 하는 일, 만나는 고객을 통하여
1이라도 더 나은 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부터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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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비냐? 자유냐?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소비와 물질주의가 마스터키가 되는 시대에서
인내, 금욕, 헌신의 삶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고
자발적 조기 은퇴를 선택하여
가족을 기반으로 한 소공동체를 지향하는 파이어족.

2. 불을 지피기 위한 조건들

약 200년 전 월든 호숫가에서 소로우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소박하고 검소한 삶이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깨우침을 전했다.

그리고 파이어족은 마치 현대의 월든처럼
소비문화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자주적인 소공동체 속의 경제적 자유를 선언한다.

하지만 파이어의 과정에서 더욱 절감하듯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유란
‘경제적‘이라는 수식어를 제거한 채로는 성립불가능한 것.

조기은퇴의 불을 성공적으로 피우기 위해서는
- 지리적 차익(Geo-arbitrate 생활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소도시, 지방 이동)을 취하면서도
- 연 10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확보할 만한 직업유연성을 갖추고 있고
- 그러한 삶을 지지해 줄 건실한 공동체(가족)가 있으며
- 노후 자산을 확보할 금융상품(우상향 하는 주식시장!)이 안정적으로 존재하는
등의 상당히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필요로 한다.

3. 자유냐? 생존이냐?

결국 파이어족의 경제적 자유란
자본주의라는 태풍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가 살기를 기대하는 선택지.

그리고 코로나19가 촉발시킨 불황처럼
시장은 언제든 심연의 괴물로 돌변할 수 있으며
괴물의 예측불가능한 일탈에 쓸려나간 이들은
바로 사회적 재난상태에 빠져 미래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파이어족이 추구하는 자유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생존기와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소로우라도
알뜰한 저축과 성공적인 투자가 없으면
이제 월든 호숫가에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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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로나19 커버스토리 때문에 구매했으나
가장 먼저 눈이 간 기사는
신학의 가장 고전적인 테마인
신정론, 악과 신의 존재 증명이었다.

2. 이성의 전개

- 이 테마에 관한 업데이트 된 논거들이 담겨 있다
- 하지만 어차피 논증으로 완벽히 해결될 수 없는 주제다(사형제와 같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끈질기게 숙고하게 만드는
생각의 힘은 언제나 필요하다

3. 믿음의 현장

3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요한 11, 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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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살장 속 인간

도살장에 돼지 한 마리가 놓여있다.
홀로코스트의 현실 속에서 그 개체가 취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란 무엇이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무서운 인간들을 피할까,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가장 절박한 자기보존의 본능에 따라,
오로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대오 속에 몸을 파묻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행동이 없다.

다시, 아우슈비츠에 놓인 한 인간이 있다.

인간의 생명, 존엄성, 인격의 가치가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의지와 자유가 박탈되고,
단지 처형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세계.

그의 존재가 그저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고
때로는 여기에 때로는 저기로 몰려다니다
결국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 개체는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할 수 있을까.

비극과 절망의 삶을 버티고 살아내어 돌아온 저자의 언어는 짧고 담담하지만
매순간 가슴을 치며 그가 보듬어왔던 삶의 무게를 가늠하게 만든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
삶을 살아갈 의미에 대해
이 책보다도 더 절실한 고백록은 아마 없을 것이다.


2. 비극 속에서도 낙관하는 인간

저자는 인간이란
삶을 제한하는 세 가지 비극적 요소,
고통-죄-죽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은 그저 자기보존의 본능에 따라,
유전자의 복제 요구에 순응하거나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만 조응하며 살아가는 개체가 아니다.
한 인간이 처한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도 인간은 그러한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낙관‘을 가진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 또한 더 좋게 변화될 수 있다.

삶의 비극을 직면했을 때,
그 고난과 시련의 속에서도 삶의 목적과 의미를 실현시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

인간의 마음과 의식은 그렇게 진화해가면서,
삶이 부여하는 절망을 승리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열어간다.


3. 자기 초월 - 신을 믿는 인간

저자는 ‘세상에 개방적이지 않고, 자기 종족에게 주어진 특정한 환경에 얽매여 있는 동물들과 인간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며,

생물학적 차원을 초월한 noological 차원으로 자신을 초월시킬 수 있는 존재가 곧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궁극적으로는 종교적 믿음으로 연결된다.

저자는 ˝또 다른 차원이 가능한 세상, 인간 세상을 넘어선 세상, 인간이 겪는 시련의 궁극적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을 상정하며,

‘자기 초월‘이라는 다른 동물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현상을 제시한다.

이러한 세상은 결국 신적인 차원이며,
인간 삶의 궁극적인 의미 또한
결국 절대적 존재인 신에 대한 신뢰를 통하여 찾을 수 있다는 개인적 신념을 고백한다.
(이상 ‘삶의 의미를 찾아서’)

저자의 삶이나 이 책의 가치, 로고테라피 이론에 대한 수긍과는 별개로,
결국 종교로 귀결되는 이러한 결론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은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드넓은 대지와 하늘을 바라보고
새들의 환호를 들으며 무릎을 꿇고 바친 기도는
인상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찬 이 책 속에서도
가장 큰 울림을 준다.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 그 누구보다 힘겹게 삶을 살아냈던 한 인간의 절절한 고백.

저자의 말대로, 인간은 신에 대해 말할 수는 없어도 신에게 기도할 수는 있는 것일까.
이러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인간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는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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