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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꾸준히 걸어라.
길이 엇나가도 걷다보면 샘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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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고가 떨어진 마켓컬리. 과연 긍정적 신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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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의 희망 수업 - 포기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한 축복
암브로지오 스쁘레아피꼬 지음, 박요한 옮김 / 생활성서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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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욥은 누구인가

그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1,1). 

윤리적으로 살았고사회적으로 성공하였으며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의 올바름에 대하여 악이 의문을 제기한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신이 욥에 가해지는 고통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시련이 시작된다

재산가족건강지위...그가 가졌던 조건은 모두 먼지처럼 사라지고 

욥은 삶에 들이닥친 공포 앞에서 부르짖는다.

 

나는 편치 않고 쉬지도 못하며 안식을 누리지도 못하고 혼란하기만 하구나.”(3,26)

 

인간의 삶은 고달프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직면하는 것

이 가혹한 진리를 깨닫게 된 인간욥은 영문 모를 시련에 대한 저항으로 하느님께 탄원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나의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2.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온 그의 친구들은 고통의 세계를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친구들은 하느님께 탄원하며 대답을 갈구하는 욥을 질책하고

모든 재앙에는 자신이든 가족이든 누군가의 죄라는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합리적 설명을 넘어서는 맹목적인 신앙이라는 처방을 제시한다.

 

그러니 자네가 하느님을 찾고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한다면

자네가 결백하고 옳다면 이제 그분께서는 자네를 위해 일어나시어 자네 소유를 정당하게 되돌려 주실 것이네.”(8,5-6)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난 젊은 현자 엘리후는 친구들의 논변을 종합하여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엘리후에 따르면 세계에 물든 악은 모두 인간에서 기인한 것이며

신의 올바름은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인간은 신의 뜻을 알 수 없으며 단지 하늘의 절대적 정의를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되갚으시고 인간을 그 길에 따라 대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전능하신 분께서는 올바른 것을 왜곡하지 않으십니다.”(34,11-12)

 

자신의 고통을 둘러싼 합리적인 논변 속에 욥은 세상에 던져진 고립된 존재로 돌아간다

세계의 무의미함과 필연적인 고통 앞에서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하고 내면의 어둠으로 퇴각하면서 

세상을 저주하고 한탄하는 것밖에는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욥은 체념하지 않고 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부서진 인생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간절히 청하며하늘의 정의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저에게 이 두 가지를 하지 말아주십시오그러면 당신 앞에서 숨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당신의 손을 제게서 멀리 치우시고 당신에 대한 공포가 저를 덮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러시고는 부르십시오제가 대답하겠습니다.”(13,20-22)



3.


이제 하느님이 폭풍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고 말씀을 시작하신다

무의미한 삶과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도 

오직 하느님 한 분께만 희망을 걸고 있던 욥에게 

하느님은 오히려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라고 욥을 다그치신다

그리고 그 질문은 뜻밖에도 광대무변한 우주와 장엄한 자연의 질서를 제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그 칫수를 정하였느나너는 알지 않느냐또 누가 그 위에 줄을 쳤느냐

그 주춧돌은 어디에 박혔느냐또 누가 그 모퉁잇돌을 놓았느냐

아침 별들이 함께 환성을 지르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두 환호할 때 말이다.”(38,4-7)

 

광대한 세계 앞에서 유한하고 왜소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침묵뿐

욥은 자신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가냘프게 존재하는 창조세계의 일부임을 절감한다

인간은 무능하고 연약하며 자신의 존재 이유 또한 알 수 없다

세상은 이러해야 하고하느님도 이러한 분이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덧없는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욥은 아프게 고백한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40,4)

 

어둠과 혼란 속에 허덕이면서 세상을 향하여 말을 꺼냈던 욥은 기어코 절대자의 현존 앞에 선다

말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의 심연을 거쳐 온 우주를 아우르는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 욥.

귀로만 들어왔던”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좁은 이해에 갇혀 있던 욥은 

이제 자신이 말하는 대신 하느님이 말씀하시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인식에 이르기까지 그는 혹독한 대가를 치룰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결국 하느님을 만난 인간이 되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42,5-6)



4.


정의의 회복이 시작된다

삶과 고통의 무게를 모른 채 욥을 논박했던 친구들의 신학적 담론이 깨지고 욥과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욥이 잃었던 재산가족관계도 모두 회복되며 욥은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난다.

 

고통은 신의 부재를 초래한다.

영혼의 어두운 밤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욥은 자신에게 죽음보다도 더한 공포를 안겨주었던 신의 침묵 속에서도 결코 체념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탄원하고 기도하였으며 신을 찾기를 멈추지 않았다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하느님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는 존재

짙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을 수 있는 존재

미약하면서도 희망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곧 인간이다


욥기의 거룩한 독서는 모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전하는

삶의 시련과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항상 우리를 이끄시고 찾으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희망의 여정이 될 것이다.

 

나는 알고 있나네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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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불가해한 삶을 버티기 위해
무언가를 기억하려 하고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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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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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사람이 다 재앙과 관련되어 있었다.”(p.217)

재난 영화를 즐기는 심리는 무엇일까.
외계인이 쳐들어오든
빙하기가 다시 찾아오든
지구 맨틀이 폭발하든
위기 속에서 더욱 강해지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답을 찾고 재난을 끝낸다.

관객은 그저 푹신한 의자에서 스크린과 거리를 두며
자신이 속한 현실세계의 안온함을 확인하고
이웃에 사는 히어로들의 선의에 안도하며
재난을 소비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재난 영화 속에서 나온 것 같은 장면들이 뉴스에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 고통받는 도시 1순위인)
뉴욕 센트럴파크에 야전병동이 설치되고
타임스스퀘어 광장은 텅 비었으며
시신을 집단으로 매장한다.

엄청난 cg가 동반된 사건은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람들은 재난이 스크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실재할 수 있고
한 번 터진 재난은 영화 속의 근사한 시나리오처럼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2.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p.194)

이러한 재난 속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카뮈는 잊혀진 줄 알았던 전염병 페스트로 인하여 봉쇄된 도시, 오랑의 시민들을 통하여
죽음이라는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뮈라는 작가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의외로 관습적이라고 느껴진다.

도시는 피로와 절망, 권태로 가득하지만
시민들의 고통은 주로 추상적이고 익명으로 가려진 형태로 발생한다.

이러한 고통의 묘사는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며 주위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의사 리외를 비롯한 몇몇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은” 등장인물들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영웅적인 성품을 지닌 주인공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연대하여 재난을 극복’하는
익숙한 재난영화의 작법이자,
페스트라는 재난이 카뮈 특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기 위한
특수한 배경으로 소모된다는 느낌도 준다.

오히려 아카데미 레드카펫마냥 화려한 앙상블을 구성해두고
기네스 펠트로를 10분만에 죽여버리는
<컨테이젼>의 구성이 훨씬 현실반영적이라고 할까.

영화 속 세상은 특별한 음모를 꾸미는 세력도
위기를 극복하려는 구심점도 없이 그저 바이러스에 점령당한다.
(역시 유명배우들인) 몇 사람은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대다수 무명인들이 할 수 있는 행위는 그저 살기 위해 누군가를 피하는 것뿐이다.

3. “인간들은 언제나 똑같았다.”(p.360)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래한 재난은
인류가 성취해 온 문명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에 놓여 있는지,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일상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 것인지,
무능함과 무기력이 얼마나 순식간에 사회를 잠식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역병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오늘 닥친 불행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봉쇄가 풀린 오랑의 시민들마냥 환호할 날이 올 것이다.

상영시간 내내 건조한 다큐멘터리처럼 현실감 있게 공포를 전달하던 <컨테이젼>도
마지막 씬에서는 전염병의 첫날 무슨 일이 있었으며,
어떻게 전파가 되었는지를 관객들에게 확인시켜준다.

원인도 경로도 알 수 없는 스릴러에 짓눌렸던 관객도
그나마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며 영화관을 나올 수 있는 결말이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결말은 어떨까.
인수공통 감염병을 초래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는 돌이킬 수 없고
판데믹의 주기는 빨라져만 간다.

인류가 이 사태를 통해 무언가를 깨우치고
사전에 방비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이미 지구에 너무 많이 존재하며
모든 종의 생태계를 침범하고 있는 인류는
바이러스가 서식지를 찾아 떠날 최상의 신대륙이다.

언젠가 있을 '코로나 극복'이라는 환희의 외침이 무색하게
자연은 다음 번 공격을 준비할 것이다.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페스트균'처럼
'변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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