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해지면 지옥의 봄날도 나의 것이다 지옥에 봄이 오면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기에 죽어도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기에 지옥에 텃밭도 가꾸기로 했다 상추 고추 쑥갓 파 호박을 심어 호박잎에 저녁별을 쌈 싸 먹을 때마다 마음은 더욱 가난한 흙이 되기로 했다......흙탕물이 튀어서 내 마음이 더러워진 적은 없다 한때는 분노와 증오의 붉은 흙탕물이 되어 내가 썩어간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흙탕물이 흙탕물 그대로 있는 게 아름답다 모내기를 끝낸 저 무논을 보라 물은 흙탕물이 될 때 비로소 흙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흙은 흙탕물이 될 때 비로소 물에서 모를 키운다....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은 사랑이 분노의 눈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더 견고한 분노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드디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은 엎드려 꽃을 맞이하지 못하고 사랑이 증오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오할 것이다 사랑이 상처가 아니라는 사실에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사랑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랑이 인간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정할 것이다.
윤옥이 수연에게 말했다. “너의 세계냐?” 꺾인 계단을 오르던 수연이 걸음을 멈추고 윤옥을 내려다보았다. 가벼웠던 수연의 얼굴에 스치듯 진중한 표정이 지나갔다. 순간의 변화였지만 윤옥은 알아차렸다. 수연에게 민들레 야학은 심장이라는 것을. 수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저의 세계예요.” ...심장 언저리가 들끓는 것 같았다. 부르릉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리는 것 같았다. 생의 의지가 아래로부터 올라왔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언제고 삶을 마감할 때가 오겠으나 그때까지는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자신의 세계를 가꾸며 하루의 시간을 채우고 싶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친절하고 더 많이 행복하고 싶었다. 뜬금없이 운명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생각하며, 윤옥은 서서히 차오르는 적의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