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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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칭찬받을 만하고 고상한 일처럼 들리지만,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노력이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 역시 똑같은 기능장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더 미묘하고 순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자기를 강화하는 형태이다. 그런 노력 역시도 자신이 관념 속에서 ‘나’라고 여기는 이미지를 더 크게, 그리고 더 강하게 만들려는 욕망과 아무 차이가 없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토지의 경우는 소유라는 어리석음이 특히 드러난다. 백인 식민지 개척자가 침입했을 때 북미 원주민들은 토지 소유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그들에게 종이를 내밀며 서명하게 했을 때, 그들은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땅을 잃었다. 그들은 토지가 자신들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토지에 속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것은 당신의 목적이기도 한데, ‘현존’의 힘을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이것은 또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미래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 존재함’만이 당신을 에고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며, 당신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현재의 ‘지금’에만 존재할 수 있다. ‘현존’만이 당신 안의 과거를 해체시키고 당신의 의식 상태를 변화시킨다.


..행복을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 찾아다닌다면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찾아다닌다는 것은 행복의 안티테제(헤겔의 변증법에서, 첫째 단계를 부정하는 둘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교묘히 달아나지만,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는 지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있는 그대로와 마주함으로써 가능하다.


...형상 속에서는 당신은 언제나 어떤 사람보다 열등하고 어떤 사람보다 우월할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질 속에서는 당신은 누구보다 열등하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존과 진정한 겸손은 이 깨달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에고의 눈으로 보면 자존과 겸손은 대립적이다. 진리 속에서는 그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자신에 대한 시각이 좁고 제한되어 있으며 자기중심적일수록, 당신은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중심적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에만 눈이 가고 거기에 더 반응한다. 상대방의 ‘잘못’,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이라고 당신이 해석하는 부분을 상대방 그 자체로 본다. 즉, 상대방의 에고만을 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에고를 강화한다. 그 사람 안의 에고를 ‘뚫고’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에고 ‘그 자체’를 본다. 그러면 그 에고를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당신 안의 에고이다.


...에고에게 약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유일하게 진정한 힘이다. 이 영적 진리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가치관, 그리고 이 시대가 사람들에게 조건 지우는 행동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산이 되기보다는 “천하의 깊은 골짜기가 되라.”고 노자의 『도덕경』은 가르친다. 그러면 당신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너에게 흘러들어 올 것”이라고.


...세상이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당신이 미래에 성공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르쳐 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지금 성공하는 것, 오직 그것뿐입니다. 성공은 현재 순간의 성공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세상의 미친 말들에 귀 기울이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현재 순간의 성공이란 무엇인가요?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하나의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조심성과 주의력, 즉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깊이를 가지려면 ‘이 순간에 존재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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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로 경험을 디자인하라 - 고객 경험을 극대화하는 DCX 혁신의 비밀
차경진 지음 / 시크릿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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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읽는 법 - 코넌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움베르토 에코, 미야베 미유키로 미스터리 입문
양자오 지음, 이경민 옮김 / 유유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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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두 알 것이다. 차이의 핵심은 소설에 무엇이 쓰였느냐가 아니라 독자가 소설에서 무엇을 읽을 준비가 되었는가, 그러니까 소설을 읽기 전에 이런 소설에서 무엇을 읽게 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의 소설을 읽을 사람이 어떤 예상과 기대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가늠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장르에 초점을 맞춰 만들어진 작가와 독자 사이의 묵계다.


...코넌 도일은 세심하게도 전지적 시점과 일인칭 시점 사이, 객관과 주관 사이에 놓이는 신선한 서사 방법을 발명했다. 소설의 문장과 사건 기록은 모두 왓슨의 시점을 거친 것으로 주관적 판단과 강한 호불호가 뒤섞인 그의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홈스의 사건 조사와 모험 과정을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왓슨과 함께 경험한다.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홈스가 쓴 추리 수법은 기본적이고 일반적이다. 코넌 도일에게 추리의 기본 게임 규칙을 세울 자유가 있었던 덕분이다. 나중에 추리소설을 쓴 사람은 모두 코넌 도일이 세운 규칙을 지키는 한편 추리 수법에서 홈스를 뛰어넘을 아이디어를 궁리해야 했다. 따라서 이후의 추리소설에는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보이는 어떤 단순함을 담기 어려웠다. 그 단순함이란 일반 과학 원칙과 경험 법칙에 의지하며,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독자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 연막탄을 피울 필요가 없고, 이야기의 흐름이 간결하며, 작가가 스스로 생각한 수수께끼에 의기양양함이 없고, 작가가 독자를 도발하거나 조롱할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챈들러는 이런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일은 재미있지 않지만, 그가 아주 하찮은 것을 위해 죽고, 그의 죽음이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것의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는 이따금 재미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챈들러는 설령 소설에서라도 한 사람이 죽어 버리는 일이 오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해밋의 생각에 찬성하고 호응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기록될 만하고 대답을 구해야 할 일이라면, 그 죽음은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고심하게 할 만한 문명의 의제에 닿아야 한다.


...그들이 소설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대지’ 관점으로 힘들고 성실하게 얻은 결론이다. 어릴 때부터 소설을 읽은 사람은 안다. 소설이 아무리 멋지고, 마음을 잡아 끌고, 우리 자신을 다른 세상으로 이끌더라도,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숙제하라고, 자라고 말씀하시면 그 상상의 세계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어쨌든 표지를 덮고, 밥상의 밥과 반찬을, 무료한 물리 공식을, 어수선한 이부자리를 마주해야 한다...소설을 읽는 사람은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와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현실 세계를 드나드는 데 익숙하다. 소설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소설을 읽는 경험에는 이런 드나듦이 반드시 포함되며, 오늘 자기 전에 덮었던 책을 내일 방과 후에 열어 계속 읽어 나간다... 소설을 읽는 사람은 이토록 멋진 장면을 몇 번이고 드나드는 경험을 풍부하게 쌓는다.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은 이런 경험이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은 매혹적인 허구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나올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미국 청교도는 진정으로 죄악sin을 인정하며, 이 개념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현대 사회는 급속히 세속화하여 guilt(죄악감)와 sin(죄악)을 분리해 하느님이 관여하는 죄악sin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도덕과 법률상의 죄악감guilt만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이 미국에서는 더디게 진행되어 완성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진보하고 발전이 빠른 나라이지만, 이 부분에서는 진보가 가장 더딘 사회다. 미국인은 범죄추리를 단순한 지능 게임으로 여기지 못하며, 각각의 범죄 행위를 원죄와 죄악감으로 연관 짓고 속죄 문제로 끌고 간다. 그들에게 범죄는 너무 엄중하고 엄숙해서 추리의 즐거움을 위해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상상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범죄는 그들이 가진 일련의 심리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은 궁극의 존재가 가진 깊은 무게감을 무엇보다 진실하게 여긴다.그리하여 미국 독자를 움직일 수 있는 탐정추리소설은 정신과 존재에 무게가 있어야 하며, 죄악감에 진실성이 있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하드보일드 맨’이 갖춘 근본 역할이다.


...『장미의 이름』은 역사가 들어간 추리소설도 아니고, 추리가 들어간 역사소설도 아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역사추리소설이다. 그 추리는 특수한 역사 배경 아래에서만 성립되는데, 뒤집어 말하면 시대의 특수한 믿음과 풍습이 살인 사건과 추리를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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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정 - 부와 불평등의 기원 그리고 우리의 미래
오데드 갤로어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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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지평선 - 우리가 우주에 관해 아는 것들, 그리고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
아메데오 발비 지음, 김현주 옮김, 황호성 감수 / 북인어박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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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따옴표 없는 빅뱅이 있었고 온 우주가 극단적으로 뜨겁고 밀도가 높아 공간이 팽창되었고, 이 팽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아주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단계는 과거의 어느 한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추정으로 볼 때 약 138억 년 전에 발생했다. 하지만 공간과 시간에 시작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모른다. 그런데도 편의상 가상의 특이점을 시간을 카운트하기 시작한 순간으로 보고 “‘빅뱅’ 후 3분”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외삽법(外揷法, Extrapolation)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우주의 평균 밀도는 임계값과 같다. 여러분이 평균 밀도를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보고 싶다면, 우주 공간의 곡률은 큰 규모에서 0이다. 우주의 모든 원자는 임계 밀도의 약 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우주의 95퍼센트는 우리가 잘 아는 원자 물질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주의 내용물 중 약 25퍼센트가 비원자 유형의 암흑 물질이다. 우주의 내용물 중 약 70퍼센트는 빈 공간의 에너지(혹은 우주 상수)다. 이것은 우주가 팽창하는 방식에서, 즉 팽창이 가속화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알게 된 것이다. 원시 우주에는 대규모 구조의 기원을 아주 잘 설명하는 작은 불균질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이 초창기 불균질성의 출현을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급팽창 모형이다.


...지각적 한계와 함께 우리의 인지적 한계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특정한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만, 그 너머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저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인간 중심적 사고가 죄악일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과학은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 1937~ )이 ‘어디에나 있는 시선’36)이라 부른 것, 즉 특정한 관찰 지점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갈망한다. 편견이나 개인적인 취향, 열망에서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공간이나 시간의 어느 한 위치에서 갖게 되는 관점으로 변질되지 않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원하는 것이다. 직관이나 즉각적인 경험이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이게 만드는 수많은 것들이 실제로 근거가 없거나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해준 것이 바로 이 명확하고 왜곡되지 않은 비전에 관한 연구 덕분이다.


..또한, ‘발생 가능한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식의 모호하고 포괄적인 예측 너머로 가기 위한 모든 시도가 지평선 밖의 시공간을 관측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시작부터 좌절될 수 있다...그래도 관측 가능한 우주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남아 있다. 지평선 밖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험적으로 구현할 수는 없다 해도, 우리에게 있는 이론적 모형들이 상상하게 해주는 다양한 가능성은 우리 우주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니까 말이다. 따라서 과학적 가설이 없다면, 다중우주는 철학적 선택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누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과학은 문화와 사회적 계급의 장벽을 초월해 범세계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찾은 최고의 방법이다. 그리고 지식과 진보, 민주주의를 대변할 수 있는 위대한 수단이기도 하다. 주머니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렇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전달하는 사람들, 권위나 권력, 폭력을 동원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설령 의미와 확실성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열망을 충족시켜주려 한다 해도, 우리는 이들을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비교와 대화, 관찰,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을 주려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을 독려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과 인간을 탐구하고 이해하려는 타고난 욕구를 말살하는, 연민이 없는 견해들과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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