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바다에서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강동혁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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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으로 굴지 않으면 되지.」 디온이 말했다. 「내가 사무실에 핀으로 꽂아 놓은 그 인용문을 생각해 봐.」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훌륭한 삶이다.〉」 올리브가 말했다.




.... 소설 후반부에서, 올리브가 만든 등장인물인 개스퍼리자크가 왼팔에 그 구절을 새겼다. 허구의 문신이 나오는 책을 썼더니 그 문신이 이 세상에서 실현됐다. 그 일을 겪고 나자 거의 모든 일이 가능해 보였다. 올리브는 전에도 그런 문신을 다섯 개쯤 봤으나 그렇다고 상황이 덜 특별해지지는 않았다. 허구가 이 세상에 피를 흘려 넣고 누군가의 살갗에 흔적을 남긴 모습을 보는 일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현실 아닐까? 우리 대부분은 상당히 비(非)클라이맥스적인 방식으로 죽지 않을까? 우리가 떠났다는 사실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 않고, 우리의 죽음은 주변 사람들의 서사에서 하나의 플롯 포인트가 될 뿐인 것 아닐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뭔가가 있다는 겁니다. 제 생각에 인류라는 종에게는 어느 이야기의 정점을 살아간다고 믿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어요. 일종의 나르시시즘이죠. 우린 우리만이 독특하게 중요한 존재라고, 우리야말로 역사의 종말을 살고 있다고, 가짜 경보가 울렸던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나 지금이, 지금만이 비로소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고, 이제야 우리가 세상의 종말에 이르렀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이어진 세월 동안 아내와 바이올린을 연주한 밤에, 함께 요리할 때, 농장 로봇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우리 들판을 나란히 걸을 때, 현관에 앉아 오클라호마시티의 지평선 위로 반딧불이처럼 떠오르는 비행선들을 구경할 때 나는 문득문득 생각했다. 시간 연구소가 영영 이해하지 못한 점은 바로 이러했다. 우리가 시뮬레이션 안에 살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났을 때 그 소식에 대한 알맞은 반응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것. 시뮬레이션 안에 산대도 삶은 삶이다.




...조사자는 관심 있는 척하면서, 긴장하지 않으려, 잘해 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은, 탤리아 없이는 내가 허공으로, 나 혼자 저 바깥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나와 개와 농장의 로봇들만이 매일매일 이어졌다. 외로움이란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 모든 텅 빈 공간이라니. 밤이면 나는 고요한 집을 피하려고 개와 함께 현관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하는 게임, 눈을 가늘게 뜨고 달을 보면 그 표면에 있는 식민지의 더 밝은 부분들이 보인다고 믿는 놀이를 하면서. 들판 건너 저 멀리, 도시의 빛.




.....비행선 터미널에서 연주하지 않을 때 나는 탑들 사이의 거리에서 개와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그 거리들에서는 모두가 나보다 빨리 움직였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은 내가 이미 너무 빠르게, 너무 멀리 움직여 본 적이 있으며 더는 여행하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최근 시간과 움직임에 관해, 끊임없는 몰아침 속의 고요한 점이 된다는 것에 관해 아주 많이 생각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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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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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툭 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길 잃은 개 한 마리의 출현만큼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저 세월 속에 묻혀 흘러가는 여느 일탈로 말이다.




...내 아버지의 담뱃갑과 내 어머니의 은가락지. 내 이름과 내 육신을 제외하면, 부모님이 내게 남겨주신 건 오직 이것들뿐이었다. 이 행운의 부적 덕분에 나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수년간 이 거친 삶에서 꿋꿋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나니,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아무도 듣는 이 없이 자신의 말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져 버리는 걸 느끼며 옥희는 어쩐지 버즘나무의 하얀 씨앗들을 떠올렸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오묘한 방식으로 비추어 내릴 때마다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별처럼 반짝이던 그 솜털 같은 씨앗들. 바람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부는데도 그 씨앗들은 모두 단호하게 제각기 다른 길을 택해 사방으로 나부끼며 날아갔다. 언젠가 옥희는 그것들이 땅바닥까지 내려오는지 꽤 오랫동안 집중해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개도 온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 그 모든 씨앗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하염없는 공간을 계속 둥실둥실 떠다닐 뿐이었다. 자신의 말이 바로 그 흰 씨앗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방 안의 허공을 맴돌기만 한다는 걸 느꼈을 때, 옥희는 이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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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루지 (리커버 에디션) - 생각의 발견을 뒤집는 기막힌 발견
개리 마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갤리온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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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듀어런스 - 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보급판
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 김세중 옮김 / 뜨인돌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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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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