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이제 어느 때로 돌아가면 될까. 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으로 다 돌아가본 것 같아. 다시 돌아갈 가치가 있는 순간이 아직 남아 있을까. 남아 있지 않더라도, 새로운 장면을 억지로 만들어내기 위해 나는 또 과거로 도망치게 되겠지.
... ‘바뀐 건 장소일 뿐 사람이 아니다. 바닥에서 위로 올라왔지만 그 아래 있던 사람들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동일한 인간들이다. 만약 우리에게 다시 어둠이 찾아오고 우리 능력을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지옥을 재현할 것이다.’
...최주상은 이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어요. 이경선은 완전히 반대였죠. ‘우리는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지옥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이다. 그것도 혼자서 살고자 하는 욕구를 누르고 다른 이를 도와 함께 살아 돌아왔다.’ 라고요. 바닥을 기억하려는 사람과 바닥을 이겨냈다고 생각하려는 사람의 차이죠. 이 둘의 비극은 두 사람의 생각이 달랐다는 데에 있지 않아요. 거기서 그쳤다면 어느 누가 다른 한쪽을 척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비극의 원인은 두 사람이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어떤 공통된 생각 하나 때문이에요.
‘세상 사람들도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헐레벌떡 뛰어온 저를 보는 그의 시선을 받아내기가 버거웠다. ‘왜 그래, 왜 여기 편인 것처럼 굴어요?’ 그 말이 그의 눈에 새겨져 있었다. ‘이런 데에서 도망치는 데에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여준의 말이 혓바늘처럼 입안에 고였다. 죄책감을 가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오히려 끝까지 도망치지 않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