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과 돌멩이 - 2026년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ㅣ 이상문학상 작품집
위수정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1월
평점 :
...아까 보았던 새의 발자국을 발견했고, 재한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계시인가. 재한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재한은 화단 안쪽에서 눈을 피한 돌멩이를 하나 주워 손에 꼭 쥐었다. 차갑고 단단한 돌멩이. 소름이 돋은 피부와 달리 재한의 내부는 달아올랐다. 이것을 힘주어 던지면 저 창이 깨어진다. 간단한 힘의 원리.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눈과 돌멩이/위수정
...절망에 빠졌다 나오기를 반복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일종의 작가적 마음이기도 한데, 세상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그랬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모두 글 쓰는 사람이 되어 결론을 유예하며 지속적으로 퇴고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은 좀 더 느리게 흐르고, 어쩌면 엉망진창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조금 더 나은 쪽으로 향할 것이다. - 유예되는 절망/위수정
...정해는 그렇게 대꾸했고, 어둠 속 영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오갔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가 깨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캄캄한 적막 속에서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 듣고, 나누고, 새기고, 복기하면서. - 관종들/김혜진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을 마주하면, 우리는 쉽게 ‘유별난 사람’이라고 단정해버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사람을 그렇게 보지 않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한 사람의 단면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겹겹이 쌓인 사정과 감정을 들여다보려는 방식이니까요.
- 관종들/김혜진
...원망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던 듯 과거를 묻고, 전력을 다해 도망치고, 모든 게 희미해진 곳까지 멀어진 나는 이곳에 묻힌 게 뭔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 채 운다. 아무리 울어도 기억의 정경은 녹지 않는다. 용서해줄 사람도 용서받을 사람도 없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이곳은 영원한 겨울이다. - 겨울의 윤리/이민진
...페이스트리는 뜻밖에 정치적인 빵이다. 겹겹이 쌓인 층과 층 사이, 선처럼 얇은 틈이 숨어 있다. 한 입 베어 물면 버터 향이 입안에 퍼지고, 부스러기는 겹의 바깥으로 바스스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이미 어디에든 속해 있다. - 실패담크루/정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