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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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상처를 살아보는 것으로 겨우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반쯤 자조하는 기미로 매우 쓸쓸한 웃음을 보였다.
  “미라 파내러 간 사람이 미라가 돼버린 꼴이지요. ……거짓말 덕분에 정직해질 수 있다는 느낌, 이해하실지 모르겠군요. 아, 물론 이런 자리에서 잠시 잠깐 그러는 거예요. 아주 짧은 시간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나라는 인간에 애착이 있으니까요.




...그는 보드카에 취해갈 때의 각도를 사랑했다. 맨몸의 잠수처럼 깊은 명정의 심연을 향해 곧장 일직선으로 잠겨 든다. 도중의 여정은 맑디맑아서 언어는 결코 따라잡지 못하고, 풍미조차도 되돌아본 수면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빛 같았다.




‘현재가 과거의 결과라는 건 사실일 것이다. 즉 현재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준 과거 덕분이다. 유전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그래도 다른 환경에서 살았다면 그 사람은 전혀 다른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 대해 타인이 얘기하는 것은 그 과거의 모든 것도 아니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말로 설명된 과거는 과거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이 실제 과거와 다르다면 그 사랑은 뭔가 잘못된 것이 될까?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면 모든 것이 쓸모없는 일이 되는가? 그게 아니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것인가.’





...“인생,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3승4패’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4승3패겠지요. 3승4패라면 실점이 더 많잖아요.”
  기도는 단순한 말실수라고 생각해서 정정해주었지만 미스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3승4패가 좋아요. 내가 이래 봬도 엄청난 비관주의자예요. 진짜 비관주의자는 명랑하다, 라는 게 내 지론이죠. 애초에 좋은 일을 전혀 기대하지 않으니까 아주 조금만 좋은 일이 생겨도 진짜 기쁘거든요.”





...인간의 마지막 거처일 터인 내 몸이 지옥, 이라는 건 과연 어떤 고통일까. 내 몸이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인생이란.




...국가는 일개 국민의 불행한 삶에 대해 부작위였다. 그런데도 국가가 그 법질서로부터의 일탈을 이유로 그를 사형에 의해 영구히 배제하고 마치 현실은 합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태도를 기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입법과 행정의 실패를 사법이 일탈자의 존재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해주는 것으로 채무 소멸 처리를 해버리는 것은 사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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