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창비시선 501
도종환 지음 / 창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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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실랑이를 벌이는 잎들은 소란하지만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나무는 안다
바닥으로 떨어진 잎들은 어찌해야 할까
그런 불안은 시간에게 주면 된다
나무는 지금부터 마지막까지를
가만히 받아들인다
나무가 지닌 미덕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순간순간을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각하는 동안 눈발은 쏟아지고
발등에 떨어지는 겨울비 피할 길 없고
빗속에서 너는 네 사랑으로 뼈저리게 아플 것이다

거기까지가 사랑이다
봄에서 겨울까지
사랑은 너를 데리고
그 계절들을 다 지나가게 될 것이다.




...새해에도 어려운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자드락길을 걸어야 하는 날 있으리라
꽃 피었다 순식간에 낙화로 흩어지는 날 있으리라
오해의 화살이 맨살에 날아와 꽂히거나
비난의 칼날에 베여 비통해하는 저녁도 있으리라
길이 시작되는 곳에 서서 흙먼지 먼저 덮어쓰기도 하리라
그때마다 부디 나무들처럼 잘 견디기를
그때마다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하기를
두려운 밤이 고요한 새벽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하자.




...가지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나무가 일러주었다
황홀하게 물든 잎들 허공에 날려 보낼 때나
폭설이 몰아쳐 온몸 오그라드는 날에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게 실력이라고
폭우 쏟아질 때부터 눈발 날릴 때까지
하루하루를 견딜 줄 아는 힘이 실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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