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연구
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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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다루기 쉬운 부류는 지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상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보여 주는 데 너무 열심이라 말하면서 계속 자신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제가 또 진짜 문제에서 벗어나 딴 길로 샜군요.〉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표현 방식이 뭔가를 말해 준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전부 자신이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자기 문제를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너무나 뻔한 헛소리다. 자기 상태를 잘 알면 애초에 나를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보통 그들의 지력 ─ 행동을 끊임없이 합리화하는 것 ─ 이 문제의 뿌리일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화자는 학창 시절에 관해 이야기한 다음 분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어쩌다 악행까지 저지르게 되었는지 밝힌다. 처음부터 끝까지 분신은 화자에게 도덕적인 영향을 주는 인물로 그려지며 화자의 악행을 막으려 애쓴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싸운다. 〈윌슨은 계속 나를 제압하려 했고 나는 계속 그를 지배하려 했다.〉
  「윌리엄 윌슨」은 화자가 분신과 대결하다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가 찌른 것은 분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윌슨의 마지막 말이기도 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나는 졌다. 그러나 지금부터 너도 죽었다. 너는 내 안에 살았고, 내가 죽자…… 너는 너 자신을 죽였다!〉




...「〈계속해 나가지 않는다.〉」 내가 따라 말했다.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우리는 항상 계속해 나가라며 서로를 몰아댄다. 불행이 클수록 계속해 나가라는 말을 더 많이 듣는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그냥 계속해 나가라고 외친다. 하지만 살면서 뚜렷한 역경을 겪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도 계속해 나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동인형처럼 알아서 계속해 나가리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계속해 나가기를 멈추려면 의지에 따른 노력이, 폭력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그건 얼마나 큰 안식일까.





...공연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일어나서 박수를 친다. 〈브라보!〉, 〈앙코르!〉라고 외친다. 환상이 설득력 있을수록 갈채는 커진다. 하지만 극장 밖으로 나오면 무대 위의 사람들은 가짜라고, 〈그들 자신이〉 아니라고 조롱한다. 〈자기 자신이 되는〉 여정은 우상 숭배다. 그 대신 우리는 세상을 무대로 생각하고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발명하고 재발명해야만 ─ 〈여러 존재가 되어야〉만 ─ 고정불변한 자아의 독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좋아.」 그가 말했다. 「우린 다 사기꾼이지. 당신도 사기꾼, 나도 사기꾼. 차이라면 난 내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거야. 당신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훨씬 행복해질 거야.」
  「하지만 진짜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어서 뭐 하죠?」 내가 말했다.
  「스스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게 무슨 소용이지?」





...오늘 아침 잠에서 깼을 때 리베카가 나를 살살 구슬렸다. 그녀는 이런 상태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삶을 포기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불공평하다고 했다. 나도 그 말을 이해했다. 공평하지 않았다. 왜 내 잘못 때문에 리베카까지 고생해야 할까?
  리베카가 이 무감각한 상태에서 빠져나가자며 나를 꼬드겼다. 나는 리베카가 내게 뭐라고 욕했었는지 일깨워 줬다. 리베카가 사과했다. 그녀는 너무 괴로워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리베카를 탓할 수 없었다. 내게 구속된 상태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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