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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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절에는 모든 게 훨씬 더 분명했을 것이다. 마흔이 됐을 때, 혹은 결혼했을 때, 혹은 애들이 생겼을 때, 혹은 5년, 10년, 15년 동안 노력해보고 나면 그만두겠지. 그러고 나면 진짜 일자리를 구할 테고, 그러면 연기와 그 에 대한 꿈은 저녁노을 속으로 희미하게, 따뜻한 욕조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얼음 조각처럼 역사 속으로 고요히 녹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실현의 시대다.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아닌 일에 눌러앉는다는 것은 의지박약에, 고결하지 않은 선택이다. 언제부터인가 운명 같은 것에 굴복한다는 것이 고상한 게 아니라 비겁함의 징표가 됐다. 행복이란 게 모두가 달성해야만 하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고, 그걸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타협은 무엇이든 본인의 잘못인 것만 같은 지금, 행복을 쟁취해야 한다는 압력에 가끔 거의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다. 




...우정의 증표는 적정 거리를 지키는 데, 들은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눈앞에서 문이 닫히면 강제로 열고 들어가는 대신 돌아서서 가버리는 데 있다는 걸 이해한다 -




...아니면 이렇게 부엌에 혼자 있는 순간들이 명상과도 같은 순간이라는 걸, 그와 세상, 그와 세상 사람들과의 모든 상호작용을 촉발하는 사실과 진실의 수천 개의 조그만 굴절과 오염들을 미리 계획하며 허우적허우적 전진하길 멈추고 정말로 편안히 휴식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걸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나? 아무에게도, 심지어 윌럼에게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몇 년에 걸쳐 자기 생각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친구들과 달리 그는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의 기벽의 증거들을 공유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비록 친구들의 기벽을 공유하는 건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었지만.




...그는 누군가를 알게 되는 그런 과정은 자기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걸 떠올렸다. 그는 늘 잊어버렸다. 그리고 늘 다시 기억해야 했다. 그는 종종 내밀한 것들을 드러내고 과거를 탐색하는 그 모든 과정을 빨리 넘겨버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다음 단계, 뭔가 부드럽고 유연하고 편안한, 양자의 경계를 다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는 그런 관계로 그냥 순간 이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랐다.




...그의 정신이 있는 그대로 유연하게, 지루한 사고방식으로 스스로를 동여맬 필요가 없는 방향으로 밀어줬더라면 좋았을걸. 한때 개를 그릴 줄 알았던 사람을 형태만 그릴 줄 아는 사람으로 바꿔놓은 기분이야. 그에 관해서라면 난 많은 죄를 저질렀어. 하지만 때로 비논리적이게도 그중 가장 죄책감이 드는 일은 이거야. 내가 밴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어. 난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를 태우고 어딘가 황량하고 추운 무채색의 장소로 데려가서 거기다 두고 온 거야. 예전에 내가 그를 태웠을 때는 풍경이 온통 색으로 아른아른 반짝이고 하늘에선 불꽃이 쉬잇 하고 터졌고, 그는 경이로운 눈으로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던 바로 그 똑같은 장소에다가.




...우정은 상대방의 더딘 불행을, 길고 긴 지루함을, 간간이 찾아오는 승리를 목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장 비참한 순간들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특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 자기도 그 사람 옆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공리가 얼마나 진실한지 확실히 이해한다. 그 자신, 그의 삶 자체가 그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늘 현재의 나다, 그는 깨닫는다. 문맥은 바뀔 수 있다. 이 아파트에서 살 수도 있고, 즐겁고 보수도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부모와 친구들도 있을 수 있다. 존경받을 수도 있다. 법정에서는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똑같은 사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사람, 미움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공중에 떠 있는 그 찰나의 순간, 높이 떠 있는 황홀함과 끔찍할 게 분명한 착륙 사이에서, 그는 x는 항상 x와 같을 거라는 걸 이해한다. 그가 뭘 하든, 수도원에서, 루크 수사로부터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돈을 얼마나 많이 벌든 얼마나 잊으려고 노력하든, x는 항상 x와 같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의 어깨는 우지직하며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치고, 순간 고맙게도 세상이 그의 아래에서 휙 멀어져간다. x=x, 그는 생각한다. x=x, x=x.


...제이컵이 태어나기 전 어느 날 밤, 아버지께 나한테 해주고 싶은 지혜의 말씀 같은 게 있냐고 물은 적 있어. 난 농담이었는데, 아버지는 내 모든 질문에 대해 늘 그랬듯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셨지. “음, 부모가 되는 일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재조정이야. 그걸 잘할수록, 더 좋은 부모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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