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 중구 권역에서 조선의 궁궐을 부수고 종묘사직을 공원화한 일제는 용산에서 무덤까지 건드렸다. 효창원은 정조의 세자였다가 5세에 숨진 문효세자의 무덤이며, 그를 낳은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무덤도 함께 있었다. 가장 사랑했던 여인과 한껏 기대했던 자식이 묻힌 곳인지라 명칭은 ‘원’이지만 웬만한 ‘능’보다 규모가 컸다. 일제는 이 숲을 군용 비밀기지로 쓰다가 점점 민간 용도로도 쓸 생각을 가졌다...효창원은 사라지고 효창공원이 남게 되었다...이런 슬픈 역사는 해방 이후에도 묘한 방식으로 지속 또는 반전되었다. 일제의 군사 시설 등을 때려 부순 다음 효창원을 복원하는 대신 이곳에 애국열사들의 묘지를 만든 것이다. 1946년에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사람의 무덤을 만들었고, 1949년 김구가 암살되자 그도 이곳에 묻혔다.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야 세계문화유산이 되는데 대부분이 현대에 복원한 것이면서 무슨 배짱으로 신청한 것일까? 정부는 유네스코 대표를 설득해 결국 유산 등재를 이루어냈다. 그들의 눈앞에 『화성성역의궤』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성의 상세한 모양새와 크기, 높이, 면적 등은 물론이고, 건설에 참가한 사람 수, 사용된 벽돌 수까지 낱낱이 기재되어 있었다. 한국 정부는 ‘『성역의궤』에 나온 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록 복원이라 해도 옛날 그대로 정확히 재현한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처음엔 가당찮아 하던 유네스코의 반응은 점차 경악과 감탄으로 바뀌었다. 세계 어디를 뒤져봐도 전근대 시대에 이처럼 정확하고 세밀한 건축 기록을 남긴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복원된 건물보다 의궤와 그에 따른 복원 과정에 경의를 표하며 등재가 이루어졌다.





....광주의 역사는 1980년 이후 조금도 진행되지 않았다. 그것은 광주 시민들의 잘못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정말로 민주공화국이라면, 우리가 생각과 입장이 달라도 어쨌든 공동체라면, 광주의 한과 트라우마를 진실로 스러지게 할 방법을 함께 찾아가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이며, 20세기의 잔혹사가 21세기에도 되풀이될 일말의 가능성(우크라이나를 본다면, 그것은 결코 기우일 수 없다)에 대한 대비이다.




....과연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제주도의 갈등과 고난의 역사 현장을 일정에 넣을까. 누가 삼별초가 최후의 항전을 벌인 항파두리성을 찾을 것인가. 몇 명이나 관덕정을 둘러보며 그 앞에서 벌어진 이재수 민군과 천주교도들의 치열한 혈투를 떠올릴 것인가. 몇 명이나 제주4·3평화공원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아 이 땅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참극을 알아보고, 왜 이름에 ‘평화’가 붙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것인가...제주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섬이 되는 그날까지, 이 섬은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을 갓바위 부처님은 아무 말도 없이,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계속해서 내려다본다. 왕조가 바뀌고 1592년, 대구읍성이 왜군의 공격으로 불타고 허물어져 내렸다. 5년 뒤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을 맞아 조선의 민과 군과 승이 팔공산성에서 결사적으로 싸워 마침내 물리치고 만세를 불렀다. 1850년에 추사 김정희는 팔공산 일대의 금석문도 살펴볼 겸 불탔다가 중수된 은해사에 찾아와 현판을 써주었다. 1864년에는 사람과 하늘의 뜻이 통한다며 동학을 제창했던 최제우가 삿된 이단으로 몰려, 대구 경상감영에서 처형되었다. 1899년에 동학보다 더 질시받던 기독교의 십자가가 대구제일교회 꼭대기에 세워졌다. 국권 상실과 만세 운동, 6·25 전쟁까지 부처님은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같은 시기에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우파 - 기독교 세력이 주름잡던 평양은 붉은 도시로, 조선의 모스크바는 한국 보수우파의 수도로 뒤바뀌도록 만들었다. 1961년 이후, 한국의 주류 엘리트가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에서 대구 경북 출신의 사람들로 교체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그런 굴곡진 헤게모니의 역사는 오늘날 겉보기로는 마냥 평화롭기만 한 고분과 경상감영공원 터에 깃들어 있다.




....연천 자체도 38선으로 나뉘어 북한군이 철원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과, 국군과 유엔군이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는 길목에 모두 걸쳐 있게 됐다. 따라서 보개산전투, 장승천전투 등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으며, 이때 숭의전과 이색의 영당, 우화대, 심원사와 징파나루 등도 전부 또는 일부 불타 없어졌다. 남침 당일 포격에 깨진 채로 남아 있는 38선 표지석, 인천상륙작전 뒤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하며 치고 올라간 길에 세워진 38선돌파기념비, 넘쳐나는 시체를 일일이 매장할 수 없어 한꺼번에 태워버렸던 유엔군화장장, 그리고 6·25참전기념탑 등 이 처절한 역사의 흔적들도 연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난과 그 실패를 “조선사 천년 내 최대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묘청 - 평양은 전통 낭가사상과 개혁 정신을 대표하고, 김부식 - 개경은 유교 사상과 수구 의식을 대표했다. 그러나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배해 평양 천도가 무산됨으로써 한민족은 한반도에 갇히게 되고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면서 고대의 웅혼한 기상과 자주 의식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영광과 패망의 역사를 읽으며 가슴 뛰어본 적이 있다면 이제는 중국의 변두리 소도시로 남은 지안시에 남다른 감회가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물론 낭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으며, 도시는 역사를 넘어서 계속 살아간다. 고구려의 국내성, 발해의 서경압록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안시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단순한 감상 이상의 뭔가를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땅에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갈 디딤돌이 될 것이다.




....룽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간도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과 닮았지만, 다른 꼴이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용감하게 찾아간 서민들이 갖은 애를 써서 문명과 도시의 발전을 이뤄낸 것은 닮았지만, 미국에서 벌어진 원주민들 학살과 박해 과정이 일본의 손으로 이주민들에게 자행되었음은 다르다.



...지금 상경 유적지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시도가 진행 중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대 반 걱정 반이다. 한때 만주와 동북아시아 북부를 제패했으며, 요나라나 금나라 등에 비해 모자랄 것이 없었는데도 꾸준히 외면되어 온 발해가 세계사에서 마땅한 자리를 차지하는 점은 대환영이다. 그러나 등재 시도 주체가 중국이기에, 결국 상경유지박물관과 중국 교과서에 적힌 역사 인식이 그대로의 굳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점에서는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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