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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불평등 -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으로 보는 한국 불평등 30년
최병천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9월
평점 :
...1987~1998년 저기술·제조업 고용이 급격하게 줄어든 이유는 3가지 사건이 결합됐기 때문이다. 첫째, 1987년 6월 항쟁과 결합된 노동운동 때문이다. 둘째, 중국의 개혁개방 2단계 국면이 본격화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와 1992년 10월 제14차 중국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공식 노선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셋째, 1992년 8월 한·중 수교 이후 저기술·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은 중국에게 가성비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1992년 체제는 1987년 체제와 1997년 체제에 비해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안보에 이르기까지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많은 지식인이 1997년 체제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들의 상당수는 1992년 체제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의 불평등 확대, 대기업·중소기업으로 갈라지는 기업 규모의 양극화, 중화학공업·경공업의 양극화, 수출·내수의 양극화, 제조업·서비스업의 양극화, 노동시장 불평등, 경제적 이중구조, 노동시장 이중구조, 자본의 이중구조, 중소기업의 수출 비중 감소, 중간 허리층 기업의 정체 및 약화, 상층 10%의 소득집중도 급증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는 크게 5가지가 달라졌다. 그레이트 더블링(Great Doubling, 거대한 2배),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초세계화), 제2의 황금기, 중숙련·중임금노동자의 몰락, 국가 간 불평등 축소 및 국가 내 불평등 확대가 진행됐다. 1990년대 이전의 글로벌 자본주의와 1990년대 이후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이론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리처드 볼드윈(Richard Baldwin)의 설명이 매우 유용하다. 볼드윈은 《그레이트 컨버전스》에서 인류 역사 이래 세계화를 3단계, 즉 1차 세계화, 2차 세계화, 3차 세계화로 구분한다. 1차 세계화는 ‘상품의 이동’이 용이해진 경우다. 2차 세계화는 ‘생각의 이동’이 용이해진 경우다. 3차 세계화는 ‘사람의 이동’이 용이해진 경우다.
...중국의 신창타이로 인해 한국경제는 3가지 변화를 동시에 겪게 된다. 수출 증가율의 급감, 제조업 위기, 불평등 축소다. 한국의 수출이 작살나거나 제조업이 위기에 빠지면 한국경제 불평등은 줄어들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최소한 임금 불평등, 임금 지니계수에 한해서, 한국경제 불평등은 중국발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 불평등은 ‘수출 대박과 연동된’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2016~2017년 기간 동안 최저임금 1만 원 캠페인을 동조하던 사람 중에는 “시급 1만 원도 못 주는 사업장은 망해도 싸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발언을 하는 사람은 한국 산업구조의 현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저부가가치 3대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약 37.3%다. 이를 취업자 숫자로 환산하면 약 1,000만 명(전체 취업자 2,700만 명×37%)이다. “시급 1만 원도 못 주는 사업장은 망해도 싸다”라는 주장은 “약 1,0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어도 괜찮다”라고 주장한 것과 같다.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는 왜 축소됐나? 군부독재 세력이 반공주의와 수출 극대화 전략의 일환으로,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 상승을 강력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임금 통제는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상승으로 이어졌다. ‘독재적 낙수효과’가 작동한 것이다. 임금 격차는 축소됐다. 다시 말해, 임금 불평등은 축소됐다. 우리가 1부에서 봤던, 불평등이 줄어들던 ‘낙수효과의 전성기’는 독재 권력과 연동해서 작동했다. 이렇듯, 1987년 민주화 이전의 한국 노동 체제는 권위주의적 연대임금제였다. 혹은 강요된 연대임금제였다. 불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하층에게 유리하고 상층에게 불리한 하후상박(下厚上薄) 임금체계였다. 즉, 군부독재 세력은 임금 평등을 지향했다.
...한국경제는 실제로 1972년, 1980년, 1997년 3번에 걸쳐 외환위기 사태가 발생했다. 1972년 외환위기는 8·3 사채동결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한국 정부가 해결했다. 1980년 외환위기는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한국이 공산화될까 봐’ 걱정했기에 차관 지원과 채무 재조정을 해줬다. 1997년 외환위기는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과 일본 모두 차관 지원과 채무 재조정을 해줘야 할 이유도, 한국이 공산화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 이후, IMF가 가혹한 구제금융 조건을 제시한 이유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한국경제 불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부채비율의 급진적 축소였다. 이는 내부 역량과 외부 역량의 이중화를 구조화시켰다. 오늘날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기원이다. 외주화가 활성화되고 비핵심 역량의 경우 대기업의 비정규직 사용이 일상화된 이유다. 한국경제가 다시 냉전 체제에 기반한 박정희식 부채주도 경제성장 모델로 회귀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1997년 이전의 경제체제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물론 다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