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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 자체 - 현대 과학에 숨어 있는, 실재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울프 다니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8월
평점 :
... “부디 세계를 세계에 대한 우리의 記述과 혼동하지 말라. 전자는 실재이지만, 후자는 세계를 표상하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과학의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듯 개선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 특히 수학에 기초한 ‘자연법칙’이라는 표상은 실재와 같지 않다. 세계는 그저 세계일 뿐이지만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개선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래왔다. 이를테면 아인슈타인이 기술한 중력 법칙은 뉴턴의 법칙을 포괄하면서도 훌쩍 넘어선다.
...과학자가 환원주의에 사족을 못 쓰는 것은 당연하다. 어쨌거나 과학은 숨어 있는 단순함을 암시하는 패턴을 찾는 일이다. 하지만 현대 생물학은 조물주 없는 세계에서 아름다움이나 완벽함을 찾아야 하는 고충으로부터 자유롭다. ‘적당히’가 생명의 슬로건이며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적당한 경우도 있다. 단순하고 주먹구구식으로 건설된 생명 세계에는 내재적 가치가 전무하다. 따라서 생물학의 유기체는 기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기체는 진화를 통해 생겨나고 설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시계공은 눈이 멀었다.
...하지만 자연법칙은 수학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기술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주관적 상대주의가 아니다. 나는 물리적 세계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전적으로 확신하며, 우주의 행동을 최대한 속속들이 흉내 내는 모형을 만드는 일이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심지어 그것으로 밥벌이를 한다). 자연법칙이 쓸모를 가지는 것은 그런 모형 안에서다. 우주가 자연법칙이라고 불리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자연법칙이 우주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세계는 큽니다. 매우 큽니다. 제 머리는 작습니다. 매우 작습니다. 세계를 제 머릿속에 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몸속에 모종의 표상을 만들려고 애씁니다. —자크 뒤보세(노벨 화학상 수상자)
...거울을 보는 행위는 대개 무심결에 일어나지만 이따금 낯설고 불쾌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을 보는 동안 세계가 멈추고 초현실적 감각이 경험될 때다. 그야말로 세계에 대한 내적 상과 외적 상의 조우,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드물고도 무지막지한 조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을 관찰할 때 우리는 바깥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내적 삶을 투사하며 그들도 우리를 바라본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는 시점이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의 내적 자아가 마치 자신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듯 자신의 존재를 숙고하는 것이다. 거울은 두 시점을 충돌하게 하는 신기하고 거의 마법 같은 능력이 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직접 검증할 수 없는 절대적 개념이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유용성은 제한적이며 기껏해야 구체적 모형의 틀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는 근삿값에 불과하다. 세계 자체는 그 속의 모든 별, 입자, 사람과 함께 자신의 일을 한다. 자연법칙은 세계의 모형을 만들려는 우리의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시점은 제한적이며 끊임없이 진화한다. 어떤 현상은 영영 우리 너머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론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