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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지음, 이영미 옮김 / 엘리 / 2020년 11월
평점 :
“이 매끄러운 세계의 인간은 모두 절대적인 이상향에서 살고 있어요. 고통이나 슬픔을 느껴도 그것들이 없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실제로도 언제든 그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죠.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받는 현실로 가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하면 그것을 이룬 현실로 옮겨가면 되고요.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가능성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저차원 생물이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자 공포의 대상이에요. 무엇보다 이 세계의 적들이에요.” - <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 이영미 > 중에서
우리 두 사람은 운동장 쪽으로 걸어간다. 조명은 이미 꺼져 있었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차가워진 몸을, 더위로 나른해진 듯한 밤바람이 훑고 지난다.
단 한 번뿐인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훨씬, 더울 것이다. - <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 이영미 > 중에서
미아하. 내가 권총을 건넸던 사람. 나에게 권총을 건넸던 사람.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사람. 지금 내 품속에서 조용히 잠든 숨결을 흘리고 있지만, 이 사람이 미아하인지, 아니면 미아하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뇌에도 연애에도 밝지 못하다. 다만, 어쩌면…… 어쩌면, 그녀가 지금 흘리고 있는 눈물은 미아하가 미아하를 위해 흘린 눈물인지도 모른다. - <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 이영미 > 중에서
언제부터인가 마이클이 흰색 킹, 체스의 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리케이스 안에 담겨 있던 튜링의 전시 유품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 말이 나무로 빚어졌을 시절에는 분명 우리 인류가 플레이어였습니다. 우주 진출이나 원자력 같은 말을 써서 적의 세력을 꺾으려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두 개의 인공지능이 플레이어이고, 우리는 말로 전락해버렸군요.” - <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 이영미 > 중에서
밤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신칸센은 달의 기지처럼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요의 바다에 선 우주 비행사가 저 멀리 바라보는 그들의 거점은 이렇게 오아시스처럼 보이겠지. 실제로 그 속에서 즐거운 수학여행의 추억에 잠기는 시간을 연장해 살아가는 친구들은 어쩌면 낙원의 주민일지 모른다. 한없이 연옥을 닮은 낙원. - <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 이영미 > 중에서
언젠가는 너희가 말하는 ‘용’이 목적지에 다다르고, 그 속에서 옛사람들이 빠져나오는 날이 반드시 찾아올 거야. 그때 세상의 모습은 완전히 변해 있겠지. 나는 그때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없겠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밖에서 그 순간을 기다리다 맞아줘야 해. 우리는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걸 지켜왔다, 그렇게 전해주지 않는다면, 안에 있던 사람들의 슬픔이 헤아릴 수 없이 커져서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테니까. 하지만 만약 잊지 않고 기다려준다면, 재앙 대신 기적을 가져다줄지도 몰라. - <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 이영미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