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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런틴 ㅣ 워프 시리즈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12월
평점 :
...그렇다면 사람의 가치관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얘깁니까?”
“서서히 변화하죠. 좋은 이유에 의해.”
“혹은 나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예 이유가 없든가. 혹시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평균적인 사람은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서,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끝에 합리적인 윤리학을 만들어 낸 다음, 그것에서 결점이 발견되었을 때 적절한 수정을 가한다고? 그건 순수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일들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고, 그들의 인격은 자기들이 제어할 수 없는 영향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뭐가 나쁘단 말입니까? 본인이 그것을 원하고, 또 그것에 의해 행복해질 수 있다면?” - < 쿼런틴, 그렉 이건 / 김상훈 > 중에서
의식은 끊기지 않는 매끄러운 흐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뇌가 오감을 그렇게 조립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연속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련하듯이, 단속적으로 생겨납니다. 경험이란 회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현재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은 오직 과거뿐이니까요.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적인 척도입니다. - < 쿼런틴, 그렉 이건 / 김상훈 > 중에서
수축 행위가 다른 가능성들을 모조리 말살하지 않는다면, 단 하나의 견고하고 유일무이한 현실 갈래 따위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럴 경우 문제의 현실은 소멸된 대체 현실들이 존재하던 광막한 공허함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겠지만, 그 공허함은 유한하며… 그 너머에는 세밀한 현실의 갈래들로 이루어진 무한한 숲이, 개연성이 너무 낮은 탓에 말살당하지 않았던 가능성 세계들이 유령처럼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 < 쿼런틴, 그렉 이건 / 김상훈 > 중에서
“수축은 죽음이 아냐.”
“정말 그럴까요? 나를 찾아내지 못한 당신의 버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쓰디쓰게 웃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내게 충고해 준 사람은 바로 자네 아니었나? 하지만 그 얘긴 일단 인정하기로 하지. 그들 입장에서는―이건 그들이 실제로 뭔가를 경험한다면 얘기지만―그런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처럼 느껴지겠지.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경험하지 않아. 그리고 내게도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인간은 선택을 하고, 그 결과 단 하나의 고유 상태만 살아남게 돼. 그건 비극이 아냐. 그건 우리들의 존재 그 자체이고,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방식이야.”
- < 쿼런틴, 그렉 이건 / 김상훈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