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구리의 계절 1
야치 에미코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스구리의 계절

에미코 야치

서울 문화사


무덥고 탈도 많고 일도 많았던 여름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 가을이 자리를 잡았다. 매일 아침 선선한 바람과 파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 뭉텅이를 보면 ‘벌써 가을이구나’ 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 혹은 ‘독서의 계절’ 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결실을 맺는 이 시기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이다. 물론 가을의 거창한 수식어에 기가 죽어 사는 나 같은 사람들은 가을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다. 자취생이라 제대로 된 영향섭취를 못하는데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읽고 싶은 책은 많으나 발 앞에 떨어진 리포트를 처리하기 위해 절대 과제가 아니면 찾지 아니하는 두꺼운 책들과 씨름하고 있노라면 도대체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멋찌구리한 풍치에 오히려 반박하기 일쑤다. 어쨌든 서두가 너무 길었다. 그런 내게 그나마 짧은 시간 내에 즐길 수 있는 만화는 나의 소중한 여가활동임에 틀림이 없다.


가을을 피하고 싶은 자취생의 위로품


그런 중에 에미코 야치의 [스구리의 계절]은 가을에게 당한 배신감을 일부 해소시켜 줄 정도의 내공의 지닌 작품이다. 컷트 머리에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소녀, 스구리의 포즈는 사진 속 어느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스구리는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지만 그녀의 깊은 눈망울 보고 있노라면 뭔가 내게 말을 할 듯하다. 결국 그녀의 최면에 걸려 든 것인가. 나는 스구리의 계절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내게는 가을이 큰 의미를 못 가지니, 스구리의 계절로 대리만족이나 하자는 심보에서이다.


수수한 일상을 잘 표현하는 작가 에미코 야치

 

작가 에미코 야치의 작품 중 본 것은 [내일의 왕님]과 [네가 사는 꿈의 도시]가 전부이다. 처음으로 접한 [내일의 왕님]의 경우 배우를 꿈꾸는 여자 주인공이 아마추어 극단에 들어가서 연기력을 향상시킨다는 내용이던가...[유리가면]과는 달리 수수한 여주인공의 극단 생활과 평범한 사랑이 화려한 사랑을 하는 여타 순정만화 주인공과는 다른 행보를 걷기에 그 점에 오히려 신선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커다란 사건이나 반전 혹은 비밀이 전무했기에 오는 심심함이라 할까. [네가 사는 꿈의 도시]는 평범하게 살던 소녀로 어느 날 노부인인 찾아와 자신의 손녀라고 밝힌다. 노부인은 역시나 부자로 대저택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하지만 소녀는 나름대로의 뚝심으로 할머니에게 반항을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간다. 신데렐라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열심히 나아가는 소녀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소설 속 빨간 머리 앤을 연상시킬 정도로 굳세고 맑았다. 에미코 야치는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극적인 요소보다는 멜로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전개가 빠르지 않지만 여운을 주는 대사, 주인공의 심리적 고민 장면으로 주인공의 속 내음을 독자에게 아련하게 흘린다. 주인공의 일상적인 생활과 추억을 소재로 하는 에미코 야치의 [스구리의 계절]은 어떠할까.


추억의 그늘을 깨고 진정한 인형 조각가의 길로 첫발을 디디다. 


스구리는 어릴 적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센이 남긴 목각인형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센이 준 이별선물인 목각인형을 계기로 목각인형 조각을 배우고 있는 대학생이다. 스구리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소년 센과 지냈던 나날들이었다. 그녀의 현재 일상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집에서 운영하고 있는 음식점을 도와주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착하고 불평 불만도 안하는 이 천사 같은 스구리를 보고 있자면 답답하기까지 한다. 만화 속 주인공인데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지 하고 되레 애꿎은 만화책에 불평을 토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스구리야말로 대단한 주인공이다. 왜? 그건 직업에 관해 갖고 있는 편견들을 벗어버리면 간단하다. 스구리는 센이 준 목가인형을 계기로 자신의 진로를 정했다. 그리고 그녀는 20살이 지금까지 열심히 목각인형조각을 배우고 있다. 자신의 길을 홀로 외롭게 걸어가지만 그녀에게는 목각인형을 조각하면 센을 만날 수 있다는 아름다운 소망을 가지고 있다. 목각인형을 만들면서 많은 생각을 해가는 스구리의 혼잣말은 그녀의 순수함과 작품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된 센을 위해 목각인형을 만드는 스구리, 추억에 의한 조각에서 진정 자신만의 조각을 위해 나아가는 그녀의 성장, 하지만 그는 스구리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던 센이 아닌데...벌써부터 2권 소식이 기대되는 작품 [스구리의 계절]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만화라기보다는 좋은 소설을 읽은 느낌이 드는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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