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바다는 그곳 사람들의 미지의 보고이며 흥망성쇠의 근원이기도 하였다. ... 어쨋든 다른 산골지방보다 봉건제도가 일찍 무너지고 활동의 자유, 배금사상이 보급된 것만은 사실이다.p10
1864년, 고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의 아버지 대원군은 집권하였다. 그러나 병인양요를 겪고 극도에 달한 경제적 파탄으로 드디어 대원군은 그 패권을 민비에게 빼앗겼다....이무렵 통영 항구를 점묘해 보면, 고성반도에서 한층 허리가 잘리어져 부챗살처럼 퍼진 통영는 북장대 줄기를 타고 뻗은 안뒤산 기슭에는 동헌과 세병관 두 건물이 문ㅂ무를 상징하듯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p12
그 당시 시대적 배경에 맞는 통영의 모습을 글을 읽다보면 절로 지리가 세세히 그려진다.
오래전 모방송국 드라마로 '김약국의 딸들'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런 드라마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날뿐 자세한 것은 기억에 없지만 드라마는 소설의 섬세함이 턱이 없이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간창골 마을에 대한 소개에 이어 서문고개 뒷당산 우러진 대숲 앞에 충무공을 모신 사당 충렬사가 , 명정골 우물에서 서문고개로 가는 길을 되돌아 서면 대밭골, 이어 판데로 가게되는데,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에 쫓긴 왜병들이 그 판데목에 몰려서 엉겹결에 그곳을 파헤치고 한산섬응로 도주 전멸당한 곳이다. 여차저차 문등이 들이 사는 장대고개에는
묘지가 있었고 문둥이들이 떼거리로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던 이 고을에 김봉제 형제가 살고 있었다.
동생인 봉룡도 간창골에 살고 있었지만 형네 집과 뚝 떨어진 안뒤산 기슭의 청기와집에 살고 있었다. 봉화라는 누이가
한사람 있었으며 점잖은 선비같은 성품의 형과는 달리 봉룡은 몸이 건강하고 눈에는 광기가 번득이는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다. 선조에 대한 자부심과 막내아들고 자란 탓인지 누구든 자기의 의사를 거역하는 것을 광적으로 싫어하였다.
첫아들을 낳은 아내가 있었으며 전처는 시집온지 이태만에 죽었다는 소문이 맞아서 골병이 들어 죽었을 거란다.
마을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봉룡의 집은 괴괴하다. 하인 지석원고 뚝지 활터에 가고 없던 어느날, 몸이 허약하고
얼굴이 창백한 사나이가 대문앞으로 와서는 '숙정아' 부르며 대문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 여자는 유모를 불러댄다 .
이집안 서방이 곧 돌아올테니 어서 돌아가라 하지만, 별안간 대문이 열리고 봉룡이 들이 닥친다. 봉룡에게 맞은 숙정은 이튼날 숨을 거둔다. 도깨비 집이라 불리는 봉룡의 집은 폐가가 되어간다.
'도련님, 게서 뭐합니꺼' 석원은 우장속으로 소년을 끌어 당긴다.'와 오믄 안되노, 그건 우리 집 앙이가'
'자, 어서 들어가이소' 성수를 밀어 넣는다. 김약국집에까지 온 석원은 뒷문으로 들어간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