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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것을 보았어 - 박혜진의 엔딩노트
박혜진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평점 :
너무나도 잘 쓰여졌기 때문에 오히려 서평을 쓰기가 망설여지는 책이 있다. 민음사의 한국문학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로도 잘 알려진 박혜진 작가의 <이제 그것을 보았어>가 이에 해당한다. 박혜진 작가의 매끄럽고 허심탄회한, 너무나도 매력적인 문체는 작품의 엔딩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과 맞물려 독자로 하여금 이 책에 나온 모든 작품을 사랑하게끔 만든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에 계속해서 휩싸이게 되었다. “어? 이 책 나도 좋아하는데!”, “어? 이 책을 나는 아직도 못 읽었던 말야?”
왜 이렇게 끝을 보고 싶어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제때 끝내지 못해 평생을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겠다. 끝내야 할 때 끝내지 못하거나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때 서둘러 끝내버리는 바람에 끝이라면 괴롭고 아쉬운 기억이 대부분이다. 유종의 미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기에 내 앞에는 이토록 나타나지 않는 걸까.
책 중에서 인문이나 문학(주로 서양 고전소설)에 푹 빠져 사는 나 또한 그러하듯이, 하나의 완결은 주인공의 행복이나 생사(!)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에게는 충만한 안정감을 선사한다. 나는 특히 더없이 사랑하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을 읽었을 때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 등장인물이 마지막에 느꼈을 고통과는 관계없이(이 글에서는 등장하는 작품들의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려 노력하고 있다 -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두 인물(프랑켄슈타인 박사와 피조물)은 자신의 서사를 완전히 끝마치고 막 뒤에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다. 보통 현실의 끝은 중간에서 그 서사가 ‘잘려나가거나’ 점점 늘어지고 지치다 흐지부지되기 마련이다. 보통 나는 강의의 끝무렵에는 항상 마음껏 더 열심히 해 보고 더 용기를 낼 걸, 하는 아쉬움을 절감하고는 한다. 출판학교가 마무리되었을 때에도, 토플 한 달 치 강의를 완강한 지금도 나는 저자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평론가로서 작품을 마주할 때는 가능한 한 많은 구조를 살피고 그 구조가 의도하는 메세지를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 편집자로서 작품을 볼 때는 좀 다르다. 답을 만들어내기보다 다양한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결말을 상상하려고 노력한다.
저자의 직업이 ‘편집자’이자 ‘평론가’라는 점은 민음사티비(애청자이다! 너무나도!)를 통해 박혜진 편집자에 관한 콘텐츠를 감상하며 알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존경스러운 마음과 함께 유사해 보일지라도 어쩌면 대척점에 서 있는 직업을 동시에 선택한다는 건 어떠한 느낌일지 늘 궁금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책의 엔딩이 대한 감상 뿐만 아니라, 저자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 혹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이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실려 있었다. 단단한 저자의 내면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갖는다는 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또한 민음사티비의 애청자이자,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은 나에게는 저자의 이야기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에게는 나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다.
나를 방해하는 것은 나, 나를 붙잡는 것도 나, 나를 죽이는 것도 나.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과 그에 대한 평론을 몇 편 언급해보려 한다. 먼저 안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이 있다. 노문학(러시아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이처럼 ‘늪과 같은’ 한 나라의 문학은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한 책을 읽기 시작하면 특유의 황량함과 온 몸을 에는 것만 같은 추위, 그리고 인간에 대해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통찰력에 빠져들고 만다. 특히 러시아 문학의 장벽이라 여겨지는 ‘벽돌책’에 버금가는 분량은(또 하나의 장벽은 분명 다채로운 애칭일 것이다) 오히려 더 전개될 사건과 작가의 성찰에 대한 기대감이 되어 다가온다. 안톤 체호프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만큼 엄청난 분량을 써 내는 작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세심한 인물의 심리와 이가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여파를 날카롭게 궤뚫고 있다. 이 책의 엔딩이 누군가에게는 황당하고(아마 와야마 야마의 <여학교의 별>을 떠올리는 독자 또한 많을 것이다 - 이 만화책 역시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비현실적이라 여겨질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노문학에서 자주 쓰이는 인간의 본성과 ‘절망’이라는 소재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오로지 자기가 느끼고 생각한 것만을 말하는 자가 실존의 영웅, 거짓에 저항한 뫼르소는 그가 속한 세상에서 이방인이니 틀림없지만 자기 삶에서는 끝내 이방인이 아니었다.
진심은 적은 비용이 아니다. 그 적은 비용을 외면하는 인간에게는 결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방인은 내가 미처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읽었던 소설이자 처음 접한 카뮈의 작품이다(부디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모든 분들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라며!). 부끄럽지만 맨 처음에는 ‘이방인’이라는 제목을 뫼르소의 고독과 부조리함과 잘 연결짓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뫼르소는 끝내 변화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어쩌면 그 두 가지를 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거짓을 종용하는 세상에서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 되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진실을 택하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이 결심은 그를 행복한 인간으로 만든다. 얼마나 세상이 부조리하든 진실을 택하고 나아가기로 선택하는 뫼르소의 마지막은 애처롭기보단 아름답다.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막기 위해 서 있으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한다. 압도적 불안이 소설의 엔딩을 감싼다.
최근에 읽은 작품인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주인공 블로흐가 타인으로부터 느끼는 극도의 경계심과 불안감, 그리고 어긋난 소통에 관한 비극이다. 그가 느끼는 모멸감은 예상 밖의 행동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블로흐에게 안정감을 안겨준다. 자신이 ‘미리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페널티킥 앞’이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주인공은 이미 끝없는 불안감에 잠식된 위치에 서 있다. 불안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을 그린 이 짧은 소설은 엄청난 몰입감을 가지고 있다.
손들을 수 없는 타인의 마음에 전부를 걸다니, 너무 숭고한 나머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이야기를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낭만적인 풍경은 사라지고 차가운 배경만 남는다. 사랑이 지닌 가장 큰 힘이라면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것일 테다.
(이 단락은 부디 스포일러를 주의해주시길 바라며)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한 작품들 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소설들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날개>, 그리고 <동백꽃>에 대한 박혜진 작가의 날카로운 평론과 지적은 이 작품을 그저 국어 시간에 스쳐지나간 것들로(현재 이상의 작품은 주로 시를 통해 접하고 있다) 치부하던 나에게 많은 경각심을 가져다주었다. 먼저 베르테르에게 ‘주목을 사랑하는 면모’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나르시시즘적 면모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어쩌면 ‘베르테르 효과’로 인해 이 소설이 단순한 엔딩으로만 기억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박혜진 작가의 말처럼 단순한 짝사랑에 실패한 청년의 이야기 대신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치기어린’ 생각에 빠진 청년의 자각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동백꽃의 경우, 마지막 두 인물이 꽃덤불에 폭 엎어진 장면이 묘하게 간질거리는 기분을 불러일으켰던 이 소설은 권위와 위계질서에 대한 폭력으로 뒤바뀐다. 국어 시간에는, 그리고 시험기간에는 주로 동백꽃의 ‘나’를 어기숙하기 짝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점순이를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수줍고 치기어린 소녀(그래도 ‘나’에게 너무하긴 했다는 의견이 우리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로 해석하곤 했다. 또한 관계의 주도권이 여성인 ‘점순이’에게 있다는 점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동백꽃이 쓰여졌을 때와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리고 내가 사회초년생에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 해석은 필연적으로 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박혜진 작가의 말처럼, ‘나’가 느낀 감정과는 관계없이 ‘나’는 여전히 점순이로부터 쏟아지는 위계적인 폭력을 막아 낼 방도가 없다. 수능 시험을 보려면 일종의 ‘주류가 되는 해석’을 머릿속에 그대로 ‘주입’시키는 수밖에 없다(물론 과외를 하고 멘토링을 할 때 나는 수도 없이 투덜거리면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새로운 해석을 펼쳐나가는 직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 책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게 어린데도 그렇게 무정하냐.”
“이렇게 어린데도, 전하, 진실하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특히 나처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모으는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와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말 것이다. 2012년도에 방영된 텅 빈 왕관Hollow Crown을 보고 셰익스피어를 미친듯이 읽기 시작했다. 나는 희극보다 비극을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사람이고, 4대 비극 중 햄릿을 가장 사랑함에도 불구하고(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나 자신을 무한한 왕국의 왕으로 여길 수 있네,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말이지 - 이 문장을 보고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어요ㅠㅠ)리어 왕에 대한 박혜진 작가의 평론은 정말 재밌었다. 나 또한 설명충 기질이 다분하기 때문이다(무표정한 인상 덕에 오해를 많이 사기도 하고, 일종의 선생님 기질일 수도 있겠다). 대체로 우리는 에드거의 말과 달리 느끼는 걸 말하지 않으려 입을 다물고, 해야 할 말을 하려 애를 쓴다. ‘대체로 우리는 계산하다 망한다’는 문장에서는 웃음과 자괴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우리는 진실을 말하면서 살아갈 의무가 있다. 하지만, the 1975의 노래처럼, 진실됨은 어려운 법sincerity is scary이다.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마지막이라는 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박혜진 작가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보통 첫 문장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책을 고르지만(이미지라도 유명한 첫 문장이 퍼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지막 문장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끝을 봐야 하는’ 성향을 가진 나는 박혜진 작가의 이 말에 큰 위로를 얻었다. 또한, 편집자로서, 평론가로서, 그리고 작가이자 독자로써 박혜진 작가가 표현한 문학에 대한 사랑은 무한하고 애틋하다. 이 책을 통해 출판편집자와 책에 대한 일이 얼마나 멋진지, 그리고 내가 책을 얼마나 사랑해왔는지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독서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고 웃음짓게 할 만큼, 이 책은 너무나도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