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은 채식주의자 짧아도 괜찮아 4
구병모 외 지음 / 걷는사람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권 감수성을 챙기고 있는사람들에게 동물권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화제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다수의 외부인들에게는 충분히 불편하고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주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했다는 느낌을 받은 만큼, 단편들은 꽤 친절한 방식으로, 혹은 노골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았던 네 작품이 있다. 구병모 날아라, 오딘, 김연희 지용이, 이장욱 무민은 채식주의자, 정세랑 7교시.

 

구병모 날아라, 오딘

탱크폭발작전에 쓰이는 훈련견과 그 훈련사에 대한 단편이다.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가 작중의 상황과 겹쳐져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다. 엄숙한 어조로 시작을 열어준 덕인지, 이후의 이야기들도 좀더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읽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 동물에 대한 사유뿐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고찰까지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김연희 지용이

패션으로 소비되는 애완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단편이다. 무심한 투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동물은 생명을 가진 주체라는 인식 없이, 그저 수백 장의 사진과 수십 개의 동영상이었을 뿐인 장식물을 구매하는 인간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지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과정마저도 물건을 라벨링하는 매커니즘을 연상케 했다.

 

이장욱 무민은 채식주의자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단편이다. 고기의 각종 부위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에스컬레이트될수록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데, 이를 통해 결국 인간 역시 동물과 다를 바 없으며 그들과 동일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실질적인 공감위협을 불러일으킨다. 육식에 대해 가장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었다.

 

정세랑 7교시

대역병과 우주 이주 계획의 실패 이후, 체제 변혁에 성공한 미래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편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에 불과함을 알고, 환경주의를 수행하는 새로운 사회가 마침내 트라우마 없는 시민들을 키워냈다는 표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느린 자살에 불과할지라도 더 많은 생명의 공존을 도모하는 일은 어쩌면 이상에 가까운 길이겠으나, 우리는 이제라도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해야 하겠으므로.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이 중성화, 안락사, 유기동물, 소동물, 동물원 등의 주제를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동물권에 대한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종에 무관하게 각자의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을, 우리 인간들이 더 자주 떠올리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더 나은 지구를 만들 수 있기를.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환경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며, 결국 우리 역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걷는사람 시인선 14
길상호 지음 / 걷는사람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운 사람이 가만가만 불러 주는 자장가 같기도 한 시편들. 표지 컬러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깊어가는 밤의 이미지가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고 느꼈다. 글 자체의 분위기가 무겁거나 우울한 것은 아니지만, 어두운 시간대가 주는 특유의 편안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하루가 끝나갈 즈음에야 비로소 풀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들, 그 때에야 마음 놓고 느긋하게 읽어볼 수 있는 이야기들.

 

한 편의 시에 실린 이야기는 곧 한 사람의 인생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이야기는 현재의 시간선에 놓인 삶이고, ‘내일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만날 후생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회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내일 이야기를 내일의 몫으로 남겨둘 수 있는 게 아닐까. 시집은 서둘지 않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동화를 읽어주는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각각 시마다 다양한 삶의 단편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자주 사용되는 자연물의 이미지와 일상 언어들, 그리고 특히 부와 모에 대한 잦은 언급들은 시집의 분위기를 정겹고 포근하게 조성할 뿐만 아니라 시적 화자가 여전히 아이의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가끔은 잠들기 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을 흉내내보는 소년처럼. 얼핏 단단하지만 채 완전히 자라지는 않은. 그런 적정량의 순수함이 엿보인다.

 

시집은 사람의 이야기만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3부에서는 고양이들의 삶도 함께 볼 수 있다. 노랑-파랑 오드아이를 가진 고양이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시인은 우리의 죄는 야옹에 이어 여전히 고양이어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때로는 인간 아닌 동물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도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부분이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두 눈을 오가는 동안

이중국적의 감정을 익힐 수 있었으니까요

오드 아이 (p.88)

 

어른과 아이, 나를 포함한 가족과 또 다른 타인, 사람과 고양이, 밤과 밤을 지나면 오는 아침,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과 내일. 시집을 읽으며 두 눈을 오가는 동안/이중국적의 감정을 익힐 수 있었. 내가 속한 지금 여기의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지만. 내일이 되면 들을 수 있는 내일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어쩌면 그렇게 하루치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읽어나가는 것이 삶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걷는사람 시인선 14
길상호 지음 / 걷는사람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 시작되지 않은 내일의 이야기까지도 기대하게 되는 시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이크 걷는사람 시인선 24
이진희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Fake: 1가짜의, 거짓된 2모조(인조)

 


페이크는 역설이다. 시인의 쓸모없지만 빛나는 것들은 곧 현실의 모서리 틈바구니에 놓여 쉽게 잊혀졌던 것들이다. 자주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들 가짜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현실에서 소용되지 않거나 혹은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곧잘 페이크’, 가짜로 여겨지곤 한다. 현실과 아주 동떨어져 있기에 도무지 진짜로 느껴지지 않는, 환상적이고 허황된 것들을 생각하고 책을 펼쳤는데. 시가 내게 처음으로 보여준 이미지는 이미 다 닳아 현실의 테두리까지 떠밀려온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비현실감은 공유하되 예쁘고 아름답지만은 않은’. 눈앞에서 일단 치워버린 무엇.

 

새로운 풍경들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가짜들을 본 다음이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이미지를 모아 보여준대도 그것들이 순수하게 여겨질 리 없다. 이 환상은 마치 누군가 고의로 꾸며낸 것처럼, 그래, ‘모조처럼 보인다. 분홍빛 뭉게구름 같은 풍경들은 오래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금세 흩어져버리는 연기처럼. 나는 다시 현실로 내쫓겨 들어온다.

 

가짜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선 진짜가 존재해야 한다. 시인은 계속해서 나를 현실에 발 붙이고 있도록 만든다. 이 생생한 진짜들을 먼저 겪으며 건너가야 비로소 너머의 페이크에 닿을 수 있다. 수록된 시편들의 절묘한 배치는 독자인 나까지도 그 경계를 일사불란하게 넘나들도록 만든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세계가 구축되었다가 다시 허물어지기를 반복한다. 진짜의 너머에는 가짜가, 가짜의 너머에는 다시 진짜가 있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은 뫼비우스의 굴레다.

 

그러나 이러한 가짜들은 현실에서의 도피를 위한 수단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보다 또렷하게 만드는 일종의 굴절 렌즈 같기도 하다. ‘페이크를 통해 허상의 세계로 떠나는 대신, 우리는 지금 여기, 현실을 대면하게 된다. 시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며,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시인은 무한히 파기되는 하찮음을 무용하게 기록한다. 그리하여 시들은 쓸모 없게 되지만. 과연 무용한 것들이 빛나지 않는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아름답고 쓸모 없는 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정형화되지 않은 아름다움과 소용되는 일에 대해서도 역시. 이제는 모든 게 부질없다고 여겨지는 세계의 유지를 고민한다. 단절되는 죽음 아닌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저마다 가진 마음 속 경계선의 모양은 모두 다르겠으나. 그것을 넘어가 새 지평을 열기를, 혹은 그 안에 갇혀 고여 가기를 결정하는 것 역시 각자의 몫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이크 걷는사람 시인선 24
이진희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짜와 진짜를 겹겹이 쌓아올린 밀푀유 같은 이 세계를, 누가 가장 먼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