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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ㅣ 걷는사람 시인선 25
김개미 지음 / 걷는사람 / 2021년 5월
평점 :
직설적인 문장들은 솔직하고 거리낌없다. 마음에 솔직해본 적 없는 내가 글로써 말해본 적도 없는 것들을 시인이 대신 말해준다는 착각과 함께, 나는 통쾌하고 즐거워진다. 책장을 넘기는 손길은 지체 없다. 한 장씩 넘어갈수록, 더 대담하고 직설적인 문장들이 기다리고 있다. 여러 번 되짚어 읽기도 모자라 입속말로 몇 번은 더 중얼거려보게 되는 구절들이 많았다. 시집이 주었던 전체적인 인상은 다음과 같다. 손바닥이 따가울 정도로 깔끄럽고 거친, 무게감 뚜렷한 붉은 벽돌.
그러니까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사랑은 때로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지만 때로 격정과 환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랑은 뜻대로 멈추거나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의지 바깥의 것이기도 하다. 시를 읽으며 나는 함께 침잠하기도, 함께 들뜨기도 하며 화자의 ‘사랑’을 함께 경험한다. 애초에 화자는 이 사랑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 시인 역시 사랑의 이야기를 그만 써내려갈 생각은 없어 보인다. 사랑은 가장 친숙한 동시에 언제나 낯선 주제이며, 따라서 시집에 실린 이야기들은 각자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흥미롭고 빛이 난다.
1부의 말들은 날아가는 화살 같다. 무심하게 던진다기보다는 작정하고 쏘아 보내는 듯한 언어들이다. 거침없는 문장들을 신나게 읽어내리며 나는 한껏 유쾌하다. 그러다가도 2부로 접어들며 수많은 ‘너’를 향한 말들 앞에서는 막연해지고 만다. 화자의 감정들은 짙게 농축되어 있고, 꼭 그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가끔은 어디에 빗맞기도 한다. 책장 너머의 독자, 다시 나의 어깨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듯한 문장들이다. 3부에서 말들은 이제 내부로 흘러들어온다. 말려들어온다. 전달되지 않는, 그래서 생각이나 혼잣말에 불과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결코 무용하지는 않은데, 화자는 언젠가 그것을 소리내어 말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며, 아직 전하려는 의지 역시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부로 이어지며 화자는 점점 더 멀리, 혹은 점점 더 가까이 밀려나다가, 다시 끌려들어온다. “너, 거기 어디야?”라는 ‘너’의 물음만으로.
‘나’를 붙잡는 ‘너’의 이미지가 오래오래 강렬하게 남는다. 사랑이란 예측 불가능한 것이라지만 시집을 읽는 내도록 나는 자꾸 이다음은 어떻게 될지를 가늠해보게 되는 것이다. 가슴 아래에 묵혀둔 말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차마 뱉어두지 못하고 지금껏 참아왔다면. 화자의 입을 빌려 대신 성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마침내 돌아갈 곳을 찾은 유랑객의 기분으로 책장을 덮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