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크 걷는사람 시인선 24
이진희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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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ke: 1가짜의, 거짓된 2모조(인조)

 


페이크는 역설이다. 시인의 쓸모없지만 빛나는 것들은 곧 현실의 모서리 틈바구니에 놓여 쉽게 잊혀졌던 것들이다. 자주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들 가짜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현실에서 소용되지 않거나 혹은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곧잘 페이크’, 가짜로 여겨지곤 한다. 현실과 아주 동떨어져 있기에 도무지 진짜로 느껴지지 않는, 환상적이고 허황된 것들을 생각하고 책을 펼쳤는데. 시가 내게 처음으로 보여준 이미지는 이미 다 닳아 현실의 테두리까지 떠밀려온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비현실감은 공유하되 예쁘고 아름답지만은 않은’. 눈앞에서 일단 치워버린 무엇.

 

새로운 풍경들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가짜들을 본 다음이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이미지를 모아 보여준대도 그것들이 순수하게 여겨질 리 없다. 이 환상은 마치 누군가 고의로 꾸며낸 것처럼, 그래, ‘모조처럼 보인다. 분홍빛 뭉게구름 같은 풍경들은 오래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금세 흩어져버리는 연기처럼. 나는 다시 현실로 내쫓겨 들어온다.

 

가짜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선 진짜가 존재해야 한다. 시인은 계속해서 나를 현실에 발 붙이고 있도록 만든다. 이 생생한 진짜들을 먼저 겪으며 건너가야 비로소 너머의 페이크에 닿을 수 있다. 수록된 시편들의 절묘한 배치는 독자인 나까지도 그 경계를 일사불란하게 넘나들도록 만든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세계가 구축되었다가 다시 허물어지기를 반복한다. 진짜의 너머에는 가짜가, 가짜의 너머에는 다시 진짜가 있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은 뫼비우스의 굴레다.

 

그러나 이러한 가짜들은 현실에서의 도피를 위한 수단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보다 또렷하게 만드는 일종의 굴절 렌즈 같기도 하다. ‘페이크를 통해 허상의 세계로 떠나는 대신, 우리는 지금 여기, 현실을 대면하게 된다. 시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며,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시인은 무한히 파기되는 하찮음을 무용하게 기록한다. 그리하여 시들은 쓸모 없게 되지만. 과연 무용한 것들이 빛나지 않는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아름답고 쓸모 없는 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정형화되지 않은 아름다움과 소용되는 일에 대해서도 역시. 이제는 모든 게 부질없다고 여겨지는 세계의 유지를 고민한다. 단절되는 죽음 아닌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저마다 가진 마음 속 경계선의 모양은 모두 다르겠으나. 그것을 넘어가 새 지평을 열기를, 혹은 그 안에 갇혀 고여 가기를 결정하는 것 역시 각자의 몫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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