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이 가만가만 불러 주는 자장가 같기도 한 시편들. 표지 컬러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깊어가는 밤의 이미지가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고 느꼈다. 글 자체의 분위기가 무겁거나 우울한 것은 아니지만, 어두운 시간대가 주는 특유의 편안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하루가 끝나갈 즈음에야 비로소 풀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들, 그 때에야 마음 놓고 느긋하게 읽어볼 수 있는 이야기들.
한 편의 시에 실린 이야기는 곧 한 사람의 인생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이야기는 현재의 시간선에 놓인 삶이고, ‘내일’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만날 후생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회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내일 이야기를 내일의 몫으로 남겨둘 수 있는 게 아닐까. 시집은 서둘지 않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동화를 읽어주는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각각 시마다 다양한 삶의 단편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자주 사용되는 자연물의 이미지와 일상 언어들, 그리고 특히 부父와 모母에 대한 잦은 언급들은 시집의 분위기를 정겹고 포근하게 조성할 뿐만 아니라 시적 화자가 여전히 ‘아이’의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가끔은 잠들기 전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을 흉내내보는 소년처럼. 얼핏 단단하지만 채 완전히 자라지는 않은. 그런 적정량의 순수함이 엿보인다.
시집은 사람의 이야기만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3부에서는 고양이들의 삶도 함께 볼 수 있다. 노랑-파랑 오드아이를 가진 고양이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시인은 『우리의 죄는 야옹』에 이어 여전히 고양이어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때로는 인간 아닌 동물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도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부분이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두 눈을 오가는 동안
이중국적의 감정을 익힐 수 있었으니까요
오드 아이 中 (p.88)
어른과 아이, 나를 포함한 가족과 또 다른 타인, 사람과 고양이, 밤과 밤을 지나면 오는 아침,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과 내일. 시집을 읽으며 “두 눈을 오가는 동안/이중국적의 감정을 익힐 수 있었”다. 내가 속한 지금 여기의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지만. 내일이 되면 들을 수 있는 내일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어쩌면 그렇게 하루치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읽어나가는 것이 삶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