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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흩어진 글들을 한데 모아 본다.  

파편화된 기억처럼 흩어진 나의 글들은 애초 누구의 것도 아닌 듯 유령처럼 떠돌아 다닌다.  

정처없는 글을 불러 모아, 또 다시 이름 모를 이정표를 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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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의 하루
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이종인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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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줄의 이야기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을 만날 때가 있다. 짧은 이야기로 축약하기에는 작가의 세계관이 방대하거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해서 쉽게 줄거리를 옮길 수 없는 소설이 있다. 이를테면 이야기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소설이 있는 것이다. 그런 소설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독서를 요구한다.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메뚜기의 하루]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은 방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도,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소설도 아니며 그렇다고 형식적으로 난해한 소설도 아니다. 등장인물은 많지 않으며 이야기는 의외로 단순하고 분량도 많지 않아 (300페이지가 채 안된다) 쉽게 술술 읽힌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서도 소설의 전체윤곽이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화가인 토머는 헐리우드의 영화사에 무대와 의상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로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같은 주택에 살고 있는 페이 그리너를 좋아한다. 그녀는 열일곱살에 매력적인 여성으로 헐리우드에서 배우가 되기를 꿈꾼다. 페리에겐 토머 말고도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가 더 있다. 그 중 한 명인 호머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중년남성이다. 하지만 그는 삶에 대한 뚜렷한 목표도, 원하는 것도 없이 사는 무기력한 인물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얼은 카우보이 출신에 혈기 왕성한 잘 생긴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땡전 한푼 없는 무일푼이다. 페리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호머와 동거하면서 젊고 잘 생긴 얼과 놀아다니고 토머와는 편한 친구로 지내는, 매우 이상한 관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호머의 집에서 파티가 벌이지고 파티는 난장판이 되고 만다. 다음날, 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이렇게 정리해도 이게 무슨 이야긴가 싶다. 당혹스러운 것은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야기 진행과 전혀 상관없을 법한 영화 시사회 장면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데, 배우을 보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든 군중들에 대한 장황한 묘사는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작가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덮어둔 책장을 다시 찬찬히 들춰보면, 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지'를 쫓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이 한 권의 책은 한 폭의 그림에 대한 비유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토머가 구상하고 있는 '불타는 로스엔젤레스'의 그림인 것이다. 너새네이얼 웨스트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극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한 폭의 기괴한 풍경화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책상, 카운터, 들판, 따분한 기계 등에서 평생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해왔다. 그리하여 푼푼이 돈을 모아 충분히 저축했을 때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여가를 꿈꾸어왔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그들은 10달러 혹은 15달러의 주급을 꺼내어 쓸 수 있다. 이럴 때 햇빛과 오렌지의 땅인 캘리포니아 말고 어디로 가겠는가? (중략)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농담에 지니지 않았다. 오렌지는 그들의 피곤한 혓바닥에 자극을 주지 못했다. 그들의 느슨한 몸과 마음을 팽팽하게 조여줄 수 있는 화끈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사기를 당했고 배신을 당했다. 그들은 말짱 헛것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고 뼈 빠지게 저축을 했던 것이다.  
 

페이와 그 주위를 맴도는 남자들, 새로운 삶을 꿈꾸며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사람들. 스타를 보기 위해 극장 앞으로 몰려드는 군중들. 그들 모두는 황홀한 불빛에 현혹되어 자멸하는 불나방과 같은 존재들이다. 주인공 토머는 광기에 휩싸인 군중들 속에서 그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다. 그 무자비한 광경 앞에서 토머는 자신이 구상한  '불타는 로스엔젤레스'의 그림을 머릿속으로 완성한다.

 
 

성한 다리로 서 있으면서 쇠난간에 꼭 매달려 있는 동안, 그는 그 거대한 캔버스를 채운 거친 목탄 스케치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림의 틀과 평행을 이루는 맨 위쪽에 그는 불타는 도시를 그렸다. 이집트에서 케이프 코드 식민지의 스티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적 스타일을 자랑하는 화염이었다. 그림 한가운데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겨드는 기다란 언덕의 거리가 있고 전격 중앙에는 야구 방망이와 햇불을 든 군중들이 몰려갔다. 그 군중들의 얼굴로는 그가 무수히 스케치한, 죽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온 사람들의 얼굴이 사용될 것이다.

 
 

잔인한 투계(鬪鷄) 장면, 페이와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광란의 파티, 유명배우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광폭한 군중들, 그렇게 이미지들은 유기적으로 맞물리고 점층적으로 확대되어 마침내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이 기괴한 풍경화는 꿈의 공장-헐리우드에 대한 작가가 느낀 환멸인 동시에 무기력한 삶에 지쳐 뒤틀린 욕망에 사로잡힌 미국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20세기 위대한 영문 소설 100선'의 리스트를 훑어보다 다소 생소한 작가의 이름을 발견하여 무심코 구입한 책이었지만, 매우 강한 인상을 심어준 작품이었다. 얼핏 보면 매우 쉽게 쓰여진 소설처럼 보이지만, 간결한 문체와 이야기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비유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무릇 좋은 책이란 재독(再讀)을 요구하기 마련인데,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메뚜기의 하루]는 여러 번 읽어야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소설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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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 민음사 세계시인선 3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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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랑을 노래하는 연애시는 아무리 잘 씌여진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퇴색되기 마련이어서 오랜 생명력을 지니기가 힘들다. 사랑의 아름다움이야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겠지만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어들은 냉혹한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낡은 책장 속으로 흔적없이 사라질 뿐이다. 진실한 사랑의 고백도, 숭고한 사랑의 세레나데도 파멸의 시간과 쇠퇴를 겨루지 못하고 그 아름다움을 잃거나 유치한 유행가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미학(美學)의 역사는 늘 언제나 변함없이,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구닥다리도 밀어내는 투쟁의 역사이며 그런 의미에서 시작(詩作)은 옛 시인의 언어를 동시대의 언어로 덧씌우는 작업인 동시에 사멸의 시간을 버티기 위한 시인의 힘겨운 싸움이기도 하다.

유명한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남긴 유일한 시집 <소네트>. 하지만 제 아무리 셰익스피어라 할지라도 냉혹한 세월의 흐름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사랑의 아름다움과 영원불멸함을 노래한 시들이라지만, 오늘날 독자에게는 다소 진부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여, 용서하시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시가 후손들의 눈 속에 살아 남아서 영원불멸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대가 영원한 시 속에 뿌리박는 날, 사림이 숨을 쉬고 눈으로 보고 이 글이 살아서 그대에게 생명을 주기를", 그리하여 "시간의 잔인한 손에도 불구하고 그대의 가치를 칭찬하는 내 시는 미래의 시간에도 남을 것이니"  하지만 무자비한 시간의 낫에 견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누구보다 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때론 절규하곤 한다. "너 늙은 시간아! 너의 최악을 다하라. 너의 몹쓸 짓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은 나의 시 속에서 영원히 젊어 있으리니."

<19> 

게걸스런 시간아, 사자의 발톱을 무디게 갈고 

대지가 그 귀여운 후손을 삼키게 하고 

사나운 호랑이의 턱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뽑아라. 

오래 산 피닉스를 불태우고 

급히 가면서 기쁘고 슬픈 계절도 만들라. 

넓은 세상과, 퇴색하는 모든 감미로운 것에 

걸음이 쨉싼 시간은 무엇이든지 다하라. 

그러나 꼭 하나 흉악무도한 범죄를 금하노니 

아, 내 사랑의 아름다운 이마에 너의 시간을 새기지 말며, 

너의 기괴한 펜으로 줄을 긋지 마라. 

후세에 미의 전형을 보이기 위해  

너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라. 

하지만 너 늙은 시간아, 너의 최악을 다하라. 

너의 몸쓸 짓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은 나의 시 속에서 영원히 젋어 있으리니.

   

<소네트>가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시가 영원불멸하기를 바라는 시인의 염원이 너무나 절실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무심한 세월 앞에서 쇠퇴하고 사라질테지만, 오직 그대를 노래한 이 시들만이 "그 훗날 그대의 후손이 살아남아서 그 자손과 내 시 속에서 그대는 이중으로 영생하기를" 시인은 바라고 또 바란다. 그 절절한 기도가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것일까. 비록 그의 시는 새로운 기교나 형식을 찾아볼 수 없어 때론 진부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시인의 진실한 마음은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들 마음을 건들린다. 

<76> 

내 시엔 어째서 새로운 장식이 부족한지요? 

어째서 변형이나 변화와 거리가 먼 것인가요? 

새로운 방법이나 이상한 복합어에 

유행을 따라 곁눈을 팔지 않는가요? 

어째서 항상 같은 식으로만 써서 

창조력을 잘 알려진 한 가지 장식 속에만 간직해서 

한 자 한 자가 내 이름을 말하고 

단어의 출전과 출처를 노출하는지요? 

오, 감미로운 사랑이여, 나는 항상 그대에 관해 쓰고 

그대와 사랑만이 내 주제임을 잊지 마세요. 

때문에 내 최대 걸작은 낡은 단어를 새로 옷 입히고 

이미 소모된 것을 다시 소모하는 것이지요. 

태양이 매일 새롭고 낡아지듯 

내 사랑은 이미 쓴 것을 다시 쓰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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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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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의 제목인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지칭한다. J.M. 쿳시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의붓아들 파벨의 죽음이라는 허구적 사실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의붓아들 파벨 이사예프의 하숙집에 방문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에서 죽은 아들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들에 대해서도 정작 아는 게 없다. 죽은 아들의 도시인 페테르부르크에서 아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듣는다. 하숙집 주인인 ‘안나’와 그녀의 딸 ‘마트리요나’, 과격 혁명가인 '네차예프'와 그의 일행들, 그리고 경찰들. 하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더욱 혼랍스럽게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에게서 아들의 유품 - 죽기 전에 썼던 글들과 일기장- 을 돌려받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들이 글을 썼던 책상 앞에서 죽은 아들의 공책을 펼쳐본다.   

   
 

그는 가방에서 파벨의 일기장을 꺼내 일기가 끝나고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곳을 편다. 거기에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것은 그때쯤에는 이미 파벨이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는 똑같은 방의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방은 파벨의 방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다. 더 이상 마흔아홉 살 먹은 남자가 아니다. 대신 그는 젊음과 오만함을 모두 갖춘 젊은이로 돌아가 있다. 그는 완벽하게 몸에 맞는 하얀 양복을 입고 있다. 그는 어느 정도는 파벨 이사예프다. 그러나 파벨 이사예프는 그가 자신에게 붙이려는 이름이 아니다. (중략)  이렇게 해서 마침내 시간이 되고 펜을 잡은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쓰는 말들은 구원의 말들이 아니다. 대신 그 말들은 파리들 또는 닫힌 유리창에 대고 윙윙거리는 한 마리의 검은 파리에 의한 것이다. (중략) 그는 손에 펜을 들고,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자리가 없는 묘사 속으로 하강하려고 하는 자신을 추스린다. 그는 창조의 모든 것이 발 밑에 열려 있고 통제력을 상실하고 추락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에워싸여 있다. 그는 그 순간을 음미하고 탐닉하려 한다. 그는 그것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중략)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안다. 동시에 그는 하느님과 누가 더 교활한지 싸우는 동안, 제 자신도 아니고 어쩌면 제 정신도 아니다. 그는 자신과 하느님이 서로의 둘레를 빙글빙글 도는 동안 어딘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시간도 정지한 채 지켜보고 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추락하기 직전,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내 영혼 속의 자리를 잃었다. (중략) 그에게는 그것이 그가 지불해야 하는 엄청난 대가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그 대신, 그의 영혼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모두 픽션이다. (의붓아들 파벨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아있을 당시 죽은 적이 없고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혁명 운동가였던 네차예프를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쿳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네차예프 사건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놓고 <악령>을 집필했을 당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 상태를 추적해 나간다. 의붓아들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된 여정은 어느새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으로 변모해가고 파벨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이제 도스토예프스키의 펜 끝에서 소설의 이야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파벨의 아버지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아니다. 그와 동시에 그 존재들을 넘어서는 무엇, 즉 신과 같은 창조자가 된다. 쿳시는 실재와 가상의 경계선을 넘어설 수 밖에 없는 소설가의 숙명과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예술가의 고뇌를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얘기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한 대담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별다른 감흥을 안겨다 주지 못한다. 극중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범주를 넘어서지 못할 뿐더러 소설 속에 그려진 페테르부르크라는 공간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대가의 내면을 펼쳐 보이기에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너무나 심오하며, 페테르부르크라는 공간을 이해하기에는 작가 존 쿳시는 러시아 밖에 위치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작가 쿳시의 역량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가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떠한 소설보다도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장작가’라는 화려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가 중에 대가임을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우리 앞에 드러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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