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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제목인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지칭한다. J.M. 쿳시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의붓아들 파벨의 죽음이라는 허구적 사실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의붓아들 파벨 이사예프의 하숙집에 방문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곳에서 죽은 아들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들에 대해서도 정작 아는 게 없다. 죽은 아들의 도시인 페테르부르크에서 아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듣는다. 하숙집 주인인 ‘안나’와 그녀의 딸 ‘마트리요나’, 과격 혁명가인 '네차예프'와 그의 일행들, 그리고 경찰들. 하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더욱 혼랍스럽게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에게서 아들의 유품 - 죽기 전에 썼던 글들과 일기장- 을 돌려받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들이 글을 썼던 책상 앞에서 죽은 아들의 공책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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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방에서 파벨의 일기장을 꺼내 일기가 끝나고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곳을 편다. 거기에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것은 그때쯤에는 이미 파벨이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는 똑같은 방의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방은 파벨의 방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다. 더 이상 마흔아홉 살 먹은 남자가 아니다. 대신 그는 젊음과 오만함을 모두 갖춘 젊은이로 돌아가 있다. 그는 완벽하게 몸에 맞는 하얀 양복을 입고 있다. 그는 어느 정도는 파벨 이사예프다. 그러나 파벨 이사예프는 그가 자신에게 붙이려는 이름이 아니다. (중략) 이렇게 해서 마침내 시간이 되고 펜을 잡은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쓰는 말들은 구원의 말들이 아니다. 대신 그 말들은 파리들 또는 닫힌 유리창에 대고 윙윙거리는 한 마리의 검은 파리에 의한 것이다. (중략) 그는 손에 펜을 들고,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자리가 없는 묘사 속으로 하강하려고 하는 자신을 추스린다. 그는 창조의 모든 것이 발 밑에 열려 있고 통제력을 상실하고 추락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에워싸여 있다. 그는 그 순간을 음미하고 탐닉하려 한다. 그는 그것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중략)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안다. 동시에 그는 하느님과 누가 더 교활한지 싸우는 동안, 제 자신도 아니고 어쩌면 제 정신도 아니다. 그는 자신과 하느님이 서로의 둘레를 빙글빙글 도는 동안 어딘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시간도 정지한 채 지켜보고 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추락하기 직전,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내 영혼 속의 자리를 잃었다. (중략) 그에게는 그것이 그가 지불해야 하는 엄청난 대가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그 대신, 그의 영혼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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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모두 픽션이다. (의붓아들 파벨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아있을 당시 죽은 적이 없고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혁명 운동가였던 네차예프를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쿳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네차예프 사건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놓고 <악령>을 집필했을 당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 상태를 추적해 나간다. 의붓아들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된 여정은 어느새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으로 변모해가고 파벨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이제 도스토예프스키의 펜 끝에서 소설의 이야기로 전락하고 만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파벨의 아버지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아니다. 그와 동시에 그 존재들을 넘어서는 무엇, 즉 신과 같은 창조자가 된다. 쿳시는 실재와 가상의 경계선을 넘어설 수 밖에 없는 소설가의 숙명과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예술가의 고뇌를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얘기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한 대담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별다른 감흥을 안겨다 주지 못한다. 극중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범주를 넘어서지 못할 뿐더러 소설 속에 그려진 페테르부르크라는 공간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대가의 내면을 펼쳐 보이기에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너무나 심오하며, 페테르부르크라는 공간을 이해하기에는 작가 존 쿳시는 러시아 밖에 위치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작가 쿳시의 역량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가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떠한 소설보다도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장작가’라는 화려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가 중에 대가임을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우리 앞에 드러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