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들어오면서 폴란드 내에서는 좌익 정당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정국 속에서도 민족주의 세력들도 나름 세가 커지고 있었는데 이때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로만 드모프스키가 이끄는 민족민주당(Endecja, 엔데차)이라고 불리는 정당이었다. 이 민족민주당은 폴란드 땅에서 새로운 정치 전통을 대변했다.


민족민주당의 이념의 사상적 토대는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라는 이론이다.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역사를 통하여 점점 고등 사회로 발전을 향해가고 생존투쟁에서 어떤 집단이 승리하여 부상하는지 주시함으로써 발전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에 바르샤바 대학에서 생물학을 연구하던 로만 드모프스키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민족민주당은 그리하여 국가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문화적 통합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눈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실패가 다양성이라는 것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드모프스키는 "건강하고 강력한 토대 위에 세워졌다면 국가는 항상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외래 부족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든 평화적인 방식으로든 동화시켰을 것이다. 건강한 민족은 영원히 성장하기 때문에 그 도전 또한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민족 통합을 위해 반유대주의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동안 폴란드계 농민들과 유대인들은 딱히 사이가 좋았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증오하는 관계도 아니었는데 이 무관심을 역동적으로 바꾸기 위해 민족민주당은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모든 로마 카톨릭 신자를 폴란드인 범주로 설정하며 공동체를 뿌리도 없이 원자화된 개인으로 해체시키는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윤리를 거부하는 사회주의의 계략이 유대인의 음모인 것 마냥 선동했다.


이처럼 민족민주당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지만 전통적인 보수세력과는 거리가 가깝지 않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유대인들과 어울려 사는 환경에 큰 불만이 없었고 반유대주의 사상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05년까지만 해도 민족민주당은 여전히 규모가 작았지만 농촌 문맹퇴치 운동을 지원하며 교육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확대하고 폴란드어 사용 켐페인을 벌임으로써 세를 확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의 성장을 두려워 하던 기득권층은 전통적인 보수세력에서 민족민주당으로 지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농민운동 역시 20세기 폴란드 정치의 주역 중 하나이다. 이들은 자영농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으로써 농민당(Polskie Stronnictwo Ludowe, PSL)이라는 정당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1895년쯤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농민당은 이념적으로 좌우파로 구분하기 힘든 독특한 세력이었기에 좌파든 우파든 언제든 연합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하지만 농민당 내부로 보수적인 피아스트파와 좌파적인 해방파로 나눠져있기에 사회당이나 민족민주당과는 달리 거대 단일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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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분할 이후, 한동안 폴란드의 민족운동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1963년 봉기의 실패로 적잖은 부유층 귀족들이 타격을 입으면서 민족운동 세력에는 자세를 낮추고 재기할 수 있는 상황을 모색하는 부류들이 남았다. 그러던 와중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폴란드 민족운동의 무대는 귀족의 저택에서 성장한 도시로 옮겨갔다.


이 당시 대부분의 청년 남녀들에게는 민족해방과 사회혁명 목표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민족운동 세력에 새로 유입된 청년들은 현상유지나 과거 복고를 원하는 자들과는 손을 잡지 않는 반면 애국주의에는 공감하며 사회해방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처방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1795년에 파괴된 국가와 전혀 다른 독립국 폴란드를 원했다.


이런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곧 폴란드 사회당(Polska Partia Socjalistyczna, PPS)이라는 정당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사회당은 폴란드 인텔리겐치아들 사이에서 19세기식 혁명적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사상을 가졌고 당 강령은 "폴란드 노동계급의 정치조직으로서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을 쟁취하려는 사회당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정치적 노예제를 타파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정권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투쟁하는 사회당의 목표는 '독립 민주공화국'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목표를 밝히고 있다.


또한 사회당의 주장에 따르면 독립은 오로지 민중의 지지로만 얻을 수 있었고 사회혁명은 민족해방을 포함되어야 한다는게 핵심이었다. 이와 반대로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은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도 거부했다. 이들의 목표는 오로지 국제적 사회주의 혁명 뿐이며 러시아 사회당 및 독일 사회민주당과도 긴밀하게 연대를 유지하며 자본주의의 연결고리를 공동으로 끊어내고 모든 인민의 삶을 해방시키려는 이상주의 희망을 실어갔다. 당연히 민족주의적인 사회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편으론 사회당 및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과는 차별화되는 또 다른 사회주의 세력으로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 범 유대인 노동자 동맹(Bund)가 있었다. 원래 사회당은 창당 직후부터 내부제으로 유대인 분과를 두고 있었는데 사회당 측은 유대계 노동자들이 폴란드어를 사용하는게 타당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는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못했고 1897년에 가서는 사회당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인 조직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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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 취임한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대미자주파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미국 외에도 동남아와 호주, 한국 등 주변 아시아 국가들로 외교 범위를 넓혀갔고 더 나아가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을 꿈꿨는데 왜냐면 당시 미일 안보조약은 주일미군 주둔이 되면서도 정작 미국은 일본을 보호해줄 의무는 없으며 일본은 미군의 기지 사용에 대해 발언권이 없는 등 불평등조약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960년 1월,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회담을 거쳐 마침내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미일 안보조약을 드디어 개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좌파 야당인 사회당과 공산당은 일본이 냉전 질서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며 대놓고 반발 및 총평을 이용해 반정부시위를 일으켰으며 거기다가 그 해 6월 칸바 미치코라는 여학생이 사망하며 분뇌한 일반 시민들까지도 시위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미일 안보조약 비준동의안이 참의원의 의결 없이 성립된 6월 23일에 기시 수상이 사퇴함에 따라 안보투쟁도 자연스럽게 사그라 들다가 이케다 하야토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완전히 끝났다.


이러한 안보투쟁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단체로는 전학련이 꼽히는데 그 중에서 분트라는 조직이 핵심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보투쟁의 주도자 위치라는게 무색하게도 전학련은 1958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공산당과 결별하며 만든 조직이었는지라 서기국에 전화기가 한 대 뿐에다가 전화세가 반년치가 밀려있을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했었다.


그러다가 안보조약 개정 저지 투쟁과 기시 내각 타도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와세다대학교 차고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전차 임대료 1대당 5천엔에 버스는 7천엔이라는 높은 가격이었는데도 1회에 20~30대를 동원할 정도로 갑자기 엄청난 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자금의 출처는 어디였나 하면 다나카 키요하루라는 우익활동가였다.


다나카 키요하루는 미국 정보 관계자와도 친분이 있었던 인물로 특히 시마 시게오 전학련 서기장과 접촉해 자금을 제공했다. 그는 전력업계의 핵심인 마쓰나가를 비롯해 제철, 제지, 신문 등 수많은 업계의 후원자들을 소개해줬다고 하며 자금을 제공해준 이유로 훗날 자서전에 좌익 세력이 공산당 주도 하에 뭉치면 큰일이니 내부 대립을 조장하거나 혹은 기시 내각을 무너뜨릴 이유였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학련에 제공된 자금은 다나카 키요하루의 것이 아니라 재계 총수의 것이었다. 아래는 재계에서 돈을 받은 인물 중 한명인 전학련의 중앙집행위원 시노하라 고이치로가 한 말이다.


" 재계 비밀그룹이 있었는데 일본정공의 회장인 야마자토 히로키 등은 기시를 반대하고 있었다. 안보투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기시를 밀어내고자 반대 시위를 이용하려 했다. 그 역할을 다나카 키요하루가 맡았다. 그는 재계의 이마자토 히로키나 나카야마 소헤이 일본흥업은행 부회장 등과 같이 일했다. 역시 기시에게 맡기면 큰 일 난다는 생각이 젊은 재계인들 사이에 강하게 있었다. " (고지마 히로시, <60년 안보 6명의 증언>)


이 중에서 한번 나카야마 소헤이와 이마자토 히로키를 주목해보자. 이 두 사람은 친미노선을 따르는 젊은 경영자 그룹인 경제동우회의 창설 멤버인데 1961년부터 일본흥업은행 은행장이 된 나카야마 소헤이는 안보투쟁 당시 경제계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흥업은행 조사부장 시절 GHQ와 여러번 교섭을 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또 한편으론 1960년 6월 9일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 이시자카 회장 등이 모여서 신안보조약을 승인해야 했고 기시 수상은 적당한 시기에 퇴진해야 한다는 방침이 나왔었다. 이때 재계 인사들이 이케다 하야토를 선호하는 상황은 훗날 총리가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저서 <천지유정>에 잘 나와있다.


" 이케다는 재계 수뇌부의 지지를 확실히 확보했다. 마쓰나가가 '나카소네, 자네가 정치가로 성장하고 싶다면 재계와 관계를 맺어야 해.'라고 충고했다. 이케다는 그런 면에서 재계와 깊숙이 연계되어 있었다. "


그래도 만약 재계가 진짜 확실하게 기시 정권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면 왜 그랬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우선 이 당시는 전무경기가 끝나고 이와토경기가 시작되어 설비 투자들이 급증하며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었는데 경제 문제 때문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또한 기시의 냉전 질서 가담 문제도 자위대 군사력이 증강하면 재계 역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도 반대의 이유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 일각에선 CIA와 미군 관계자가 기시 노부스케의 자주노선을 우려해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재계를 이용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반 이바노비치 코발렌코가 <대일공작 회상>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소련 정부도 안보투쟁 당시 일본 사회당과 공산당을 배후에서 지원해줬다고 하고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기시 내각의 관계가 딱히 나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건 어디까지나 '설'이다.

출처: 마고사키 우케루, <미국은 어떻게 동아시아를 지배했나: 일본의 사례, 1945-2012년>, 메디치, 2012, p217~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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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기행을 벌이며 폭정을 일삼던 카롤 2세에 맞서 이온 안토네스쿠 장군은 1940년 9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카롤 2세를 쫓아내고 19살인 미하이 1세를 왕으로 세우고 전직 정권과 관련되어 있거나 또는 무능한 80명의 군 인사들을 퇴역시키며 권력을 잡았다.


한편 이 시기에 대외적인 상황은 루마니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40년 6월에는 독일군에 의해 파리가 점령당했으며 이는 루마니아의 몇 안되는 우방국인 프랑스마저 몰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틈을 타서 소련은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몰도바)를 강탈해갔고 나치 독일은 유전 지대를 통한 석유 공급을 요구해왔다. 이러면서 한 때 친영적 성향을 보이던 안토네스쿠는 친독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1년 6월 22일, 안토네스쿠 정권은 베사라비아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연합을 맺고 대소전에 참여를 선언했다. 이때는 마니우 같은 반독 정치인들이 보기에도 대소전 참전은 정당화 될 수 있었으며 국민들 사이에서도 지지가 높았다. 어쨌거나 독일군의 공세 흐름 덕분에 1941년 7~8월 베사라비아가 루마니아의 수중에 들어왔고 미하이 1세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은 여기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실제로 만약 이때 전쟁에서 발을 뺐다면 루마니아가 전범국 신세를 면했을지도 모르는게 영국 정부는 1941년 12월까지도 루마니아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뜻에서 아직 루마니아에 대해선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토네스쿠 정권은 드니에스테르를 가로질러 소련 국경을 넘어버렸는데 스탈린그라드까지 진출한 루마니아군 1개 사단은 포로가 되었으며 나머지 6개 사단은 전쟁 동안 크리미아 반도에 묵여있는 등 커다란 실책을 저지르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에 루마니아도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다고 한다. 먼저 학살이 시작된 곳은 베사라비아 지역과 부코비나 지역으로 110,033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송되었다. 그 과정이나 이송 후의 열악한 환경으로 그 중 59,392명이 1943년까지 사망했다. 이러한 안토네스쿠 정권기 내 유대인 학살 정책으로 사망한 인원은 약 40만명 가까이 되며 이는 추축국 중에서 심각한 편이었다.


결국 이러한 루마니아의 추축국 행보에 미국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있었던 회의 이후 모든 적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다소 루마니아에 대해 온건한 편이던 영국의 타협 시도를 물 건너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안토네스쿠 정권은 줄을 잘못 섰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독일의 압력에 적당히 얼버무리기만 했고 연합국과의 접촉 시도는 베른, 이스탄불, 마드리드, 스톡홀름에서 이뤄졌지만 연합국의 단호한 태도로 인해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1944년 8월 23일, 보다못한 미하이 1세는 안토네스쿠를 왕궁으로 불러들인 뒤 갑작스럽게 체포해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겼다. 그 후 독일 공군은 부쿠레슈티 왕궁을 폭격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소련군이 진입하면서 루마니아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1. 루마니아는 2차대전 초기 추축국 가담은 나름 명분도 있었고
2. 또 실질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음.
3. 그러나 제때 물러나지 못한 덕분에 전쟁에서 못빠져나왔고
4. 그 결과 소련의 공산화 물결을 피해가지 못함.


출처

- 에드워드 베르,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연암서가, 2010, p122~134

- http://www.worldwar2.ro/generali/?article=96 (WorldWar2.ro - Marshal Ion Antones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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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의 패전으로 동맹국 진영 국가들은 위기에 처했다. 우선 독일은 제국 체제의 붕괴와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와 볼프강 카프 같은 반공화국 세력의 난동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오스트리아도 헝가리와의 이중제국 체제를 상실했다. 터키도 그리스와의 전쟁과 왕정 붕괴라는 혼란을 겪었다.


특히 헝가리는 다른 참전국들보다도 심각한 영토 손실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의 경우보다 심했다. 전쟁 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동 통치자로서 제국의 절반을 차지했다. 이때 헝가리에서는 남슬라브어를 비롯해 루마니아어, 슬로바키아어 등 여러 언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헝가리어 사용자가 가장 큰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하던 각 민족들의 독립을 불러왔고 1920년 6월 4일, 체결된 트리아농 조약은 전쟁 전 영토의 70%와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잃게 만들어 헝가리를 최대 피해자 처지로 몰락하게 했다. 거기다가 1918년 11월 정전 이후로도 헝가리 내 이민족들은 연합국의 보호 아래 자신들의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런 분열을 막기 위해 미할리 카롤리라는 귀족 출신 정치가가 나와서 개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개혁을 통해 헝가리 내 이민족들이 광범위한 자치를 누리는 가운데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연합국의 적개심은 완화될 것이고 옛 영토도 조만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내대봤다. 그러나 이는 곧 헛된 희망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바로 연합국의 지원을 받은 루마니아군이 트란실바니아의 넓은 평원을 점령해버리고 계속 진군할 태세였기 때문. 카롤리는 프랑스에게 루마니아군이 철군할 수 있게 설득했지만 실패하고 말았고 1919년 3월 말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 출신 사회주의 지식인 벨라 쿤이 이끄는 공산당 세력에게 부다페스트가 넘어가고 말았다.


벨라 쿤 정부는 헝가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연합국보단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의지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쿤 정부는 슬로바키아 점령 지역의 일부를 되찾는 한편 급진적인 좌파 정책들을 펼쳐나갔고 1919년 5월에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6월 25일에는 아예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언하기에 이르었다.


영토 해체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전례없는 위기를 맞은 헝가리 기득권층은 영토 해체보단 사회주의자들에게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남서쪽 지방도시 세게드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루마니아군이 부다페스트에 진격해 벨라 쿤 정부를 무너뜨리기 냅뒀다.


한편 혁명이 진압된 이후 진행된 반혁명의 지도부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해군의 마지막 사령관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과 기성 엘리트층이 중심이었다. 그 밑으로는 귤라 굄뵈스 대위를 비롯한 젊은 장교들이 중심이 된 유사 파시즘 성향의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의회자유주의와 전통적인 권위 복구를 둘다 부정하며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뿌리를 뒀다.

출처: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교양인, 2004, p7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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