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에 취임한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대미자주파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미국 외에도 동남아와 호주, 한국 등 주변 아시아 국가들로 외교 범위를 넓혀갔고 더 나아가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을 꿈꿨는데 왜냐면 당시 미일 안보조약은 주일미군 주둔이 되면서도 정작 미국은 일본을 보호해줄 의무는 없으며 일본은 미군의 기지 사용에 대해 발언권이 없는 등 불평등조약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960년 1월,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회담을 거쳐 마침내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미일 안보조약을 드디어 개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좌파 야당인 사회당과 공산당은 일본이 냉전 질서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며 대놓고 반발 및 총평을 이용해 반정부시위를 일으켰으며 거기다가 그 해 6월 칸바 미치코라는 여학생이 사망하며 분뇌한 일반 시민들까지도 시위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미일 안보조약 비준동의안이 참의원의 의결 없이 성립된 6월 23일에 기시 수상이 사퇴함에 따라 안보투쟁도 자연스럽게 사그라 들다가 이케다 하야토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완전히 끝났다.
이러한 안보투쟁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단체로는 전학련이 꼽히는데 그 중에서 분트라는 조직이 핵심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보투쟁의 주도자 위치라는게 무색하게도 전학련은 1958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공산당과 결별하며 만든 조직이었는지라 서기국에 전화기가 한 대 뿐에다가 전화세가 반년치가 밀려있을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했었다.
그러다가 안보조약 개정 저지 투쟁과 기시 내각 타도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와세다대학교 차고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전차 임대료 1대당 5천엔에 버스는 7천엔이라는 높은 가격이었는데도 1회에 20~30대를 동원할 정도로 갑자기 엄청난 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자금의 출처는 어디였나 하면 다나카 키요하루라는 우익활동가였다.
다나카 키요하루는 미국 정보 관계자와도 친분이 있었던 인물로 특히 시마 시게오 전학련 서기장과 접촉해 자금을 제공했다. 그는 전력업계의 핵심인 마쓰나가를 비롯해 제철, 제지, 신문 등 수많은 업계의 후원자들을 소개해줬다고 하며 자금을 제공해준 이유로 훗날 자서전에 좌익 세력이 공산당 주도 하에 뭉치면 큰일이니 내부 대립을 조장하거나 혹은 기시 내각을 무너뜨릴 이유였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학련에 제공된 자금은 다나카 키요하루의 것이 아니라 재계 총수의 것이었다. 아래는 재계에서 돈을 받은 인물 중 한명인 전학련의 중앙집행위원 시노하라 고이치로가 한 말이다.
" 재계 비밀그룹이 있었는데 일본정공의 회장인 야마자토 히로키 등은 기시를 반대하고 있었다. 안보투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기시를 밀어내고자 반대 시위를 이용하려 했다. 그 역할을 다나카 키요하루가 맡았다. 그는 재계의 이마자토 히로키나 나카야마 소헤이 일본흥업은행 부회장 등과 같이 일했다. 역시 기시에게 맡기면 큰 일 난다는 생각이 젊은 재계인들 사이에 강하게 있었다. " (고지마 히로시, <60년 안보 6명의 증언>)
이 중에서 한번 나카야마 소헤이와 이마자토 히로키를 주목해보자. 이 두 사람은 친미노선을 따르는 젊은 경영자 그룹인 경제동우회의 창설 멤버인데 1961년부터 일본흥업은행 은행장이 된 나카야마 소헤이는 안보투쟁 당시 경제계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흥업은행 조사부장 시절 GHQ와 여러번 교섭을 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또 한편으론 1960년 6월 9일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 이시자카 회장 등이 모여서 신안보조약을 승인해야 했고 기시 수상은 적당한 시기에 퇴진해야 한다는 방침이 나왔었다. 이때 재계 인사들이 이케다 하야토를 선호하는 상황은 훗날 총리가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저서 <천지유정>에 잘 나와있다.
" 이케다는 재계 수뇌부의 지지를 확실히 확보했다. 마쓰나가가 '나카소네, 자네가 정치가로 성장하고 싶다면 재계와 관계를 맺어야 해.'라고 충고했다. 이케다는 그런 면에서 재계와 깊숙이 연계되어 있었다. "
그래도 만약 재계가 진짜 확실하게 기시 정권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면 왜 그랬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우선 이 당시는 전무경기가 끝나고 이와토경기가 시작되어 설비 투자들이 급증하며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었는데 경제 문제 때문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또한 기시의 냉전 질서 가담 문제도 자위대 군사력이 증강하면 재계 역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도 반대의 이유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 일각에선 CIA와 미군 관계자가 기시 노부스케의 자주노선을 우려해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재계를 이용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반 이바노비치 코발렌코가 <대일공작 회상>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소련 정부도 안보투쟁 당시 일본 사회당과 공산당을 배후에서 지원해줬다고 하고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기시 내각의 관계가 딱히 나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건 어디까지나 '설'이다.
출처: 마고사키 우케루, <미국은 어떻게 동아시아를 지배했나: 일본의 사례, 1945-2012년>, 메디치, 2012, p217~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