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 지속가능한 삶의 씨앗 1
김상현 글.사진 / 남해의봄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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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디 읽으소”

 

   올해 초인가 인터넷SNS에서 ‘남해의봄날’이라는 출판사를 보았다. 통영에 있는 출판사? 통영, 말만 들어도 살짝 맛이 가는 나는 바로 그 계정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의 7년 생활을 접고 통영에서 새로이 출발하는 출판사였다. 예술과 문화 활동이 집중된 서울을 떠나 끄트머리 통영에서 책을 만들다니...... 그냥 직장인들도 서울을 떠날 엄두를 못내는데 회사가 그것도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지방으로 내려갔다니 놀라웠다.

   이 출판사가 만든 책 중에 눈에 띈 책이 『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였다. 눈도장을 찍고 읽어야지, 주문해야지 하면서 계속 미루다가 이 달 초가 되어서야 주문했다. 주문하고 일주일 만에 받았다. 기다리는 동안 짜증도 났지만 나의 게으름을 자책하며 참았다. ㅋㅋ

   나에게 통영은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지로 시작되었다. 남망산 공원에서 시작해 강구항, 세병관, 서문고개, 충렬사, 명정샘, 판데(해저터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달아공원의 일몰, 미륵산 정상까지 올라 남해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루, 이틀의 짧은 시간에 통영의 섬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친구가 소매물도인가 매물도를 다녀와서 너무 좋았다고 하길래 올해 통영가면 한번 가보자 하고 있었다.

  『통영 섬 부엌 단디 탐사기』의 김상현 작가는 통영에서 나고 자라고 16년간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작가는 부엌은 우리의 삶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아궁이가 있는 부엌, 조상의 지혜와 생활 문화가 고스란히 남이 있는 부엌은 이제 찾기 어렵다. 작가는 그런 부엌을 찾기 위해 통영의 섬 570개 중 유인도 44개를 찾아갔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짓는 옛 모습 그대로의 부엌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하룻밤 묵으면서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통영 섬 부엌이야기는 섬마다의 특색있는 밥상에서 시작한다. 팔순의 할머니들이 시집살이를 하던 시절, 굶는 것이 일상이던 때, 어떻게든 식구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개발해 낸 톳밥. 톳밥은 보리쌀을 조금 넣고 그 위에 톳을 많이 올려 밥양을 많이 늘리는 것이다. 이 톳밥도 넉넉지 않아 애간장이 녹았다고 한다.

   통영에서는 대부분 도다리나 낭태 같은 생선을 넣고 미역국을 끓이는데 매물도에서는 성게알을 넣는다. 제주도에서 건너온 해녀들 때문이란다. 6.25 전쟁이 끝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건너온 제주도 해녀들은 가족들이 생각날 때 성게알 미역국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손님에게 대접하던 제주도의 별미가 매물도의 일품요리가 된 셈이다.

   죽도에는 남해안별신굿의 원형 굿판이 보존되고 있다. 보통 굿판은 개인의 안녕을 먼저 기원하는데 남해안별신굿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어부들의 무탈을 먼저 기원했다고 한다. 별신굿이 벌어지는 죽도 입구에는 죽은자를 위한 ‘거리밥상’과 산자를 위한 ‘손님밥상’이 50상이 넘게 차려진다고 한다. 죽도의 남해안별신굿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해묵은 궁금증이 기억났다. 작년에 어떤 TV 프로에서 통영의 섬들을 오가는 여객선을 보여주었는데, 섬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찾아가는 30대의 손녀가 할머니라는 말대신 조모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서 의아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섬 할머니에게 말을 건넬 때도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조모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 통영에서는 할머니, 할매라는 말보다 조모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게 아닌가 싶다.

   사람도 많고 번창할 때는 마을 금고에 현금다발이 그득해서 청와대에서 사람을 보내 확인을 했다는 죽도 이야기를 읽을 때는 놀라울 따름이고, 폐교 직전에 몰린 모교를 살리기 위해 뭍에까지 가서 학생들을 수소문했던 두미도 이야기는 안타깝기만 했다. 그 놀랍고 안타까운 이야기들도 점점 잊혀질 것이다.

   밥상에서 시작한 통영 섬 부엌 탐사기는 섬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작가는 그런 이야기들을 빼고 더할 것 없이 깔끔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야기들이 속이 꽉 찬 알토란 같다.

   책을 다 읽은 지금, 마지막 두미도편의 사진 한 장과 작가의 에필로그가 마음에 남는다.

  

  사진은 자식에게 줄 거라고 바리바리 싼 등짐을 메고 여객선이 닿는 마을까지 걸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이었다.

   “자식이 몇이나 됩니까?”

   “응, 일곱. 대처에서 공부시킬 욕심에 너무 일찍 내보냈어. 조금이라도 더 이 어미 품 안에 품었

   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 이리 섬에서 나는 거 몇 개라도 보내는 걸로 죄 갚음 하는 기라.”

  

  작가의 에필로그는 3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소꿉친구를 만나는 장면이다.

   학림도에서 위산제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반가운 마음에 섬을 찾은 작가는 섬과 위산제의 내력을 묻기 위해 낯선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오데서 시집을 왔심니까?”

   “토영 달애서 왔다.”

   “혹시 달애 출신 인순이 이모를 아십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인순이가 니 이모면, 니가 옥순이 아들이가?”

   “네.”

   말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가 날 와락 끌어안으셨다.

   “니 옴마하고 내는 어릴 적 소꿉동무였다. 봄 되모 진달래 꽃잎 뜯고, 물 나모 갯가서 조개 팠

   다. 산에 가도, 바다로 가도 우린 늘 같이 있었다. 눈 뜨모 보고, 눈 뜨모 보고. 그래 도 보고 싶

   더라. 그라다가 내가 이리 시집을 오고는 영 이별이었제. 60년 세월이다. 아들 이 하나 있다더

   마는 그기 니였네. 아이고, 내 자슥아, 내 새끼야. 니는 내 아들이랑 진배 없다. 오늘부터 날로

   옴마라꼬 불러라. 옴마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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