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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권력에 말하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형국.문은영 옮김 / 한국장로교출판사(한장사) / 2015년 8월
평점 :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죽순이 싹트는 것을 며칠동안 관찰 후 한데 모아놓은 영상이었다. 두터운 지표면을 뚫고 꼬물꼬물 올라오는 그 새싹의 아름다움이라니, 경이로웠다. 무릇 생명력이 넘치는 것은 움트게 마련이다. 추운 겨울도, 무거운 땅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생명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진리 또한 그렇다. 정체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란 생명력을 가질 때 진리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움직일까? 진리는 죽은 권력에게 외친다.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권력에게 "나 살아있소" 라 외친다. 우리는 그 외치는 소리를 <진리가 권력에게 말하다>라는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언자적 상상력>, <안식일은 저항이다>등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월터 브루그만은 이제 '진리의 외침'을 말해준다.
그는 성경의 내러티브를 통해 그것을 말해주는데, 첫번째로 살피는 인물은 모세다. 우리는 보통 출애굽기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쉽게 읽어버리지만 월터 브루그만은 그 속에 있는 '진리'와 '권력'의 상관관계에 주목한다. 바로는 당시 무소불위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며 엄청난 힘을 과시했다. 백성들은 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야훼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살아있는 권력,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졌던 바로에게 모세를 통해, 기적을 통해 말씀하신다.
"너의 권력은 죽었다", "진리를 가진 내가 진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권력이 왜 나쁘냐? 라고 말할수 있겠다. 저자가 말하는 죽은 권력은 바로 전체주의화된 권력이다. 정의와 평화를 입맞출때까지 힘쓰는 권력이 아니다. 가눌 수 없는 탐욕의 절정으로 드러난, 인간을 노예화 시키는 권력이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을 무한대로 부풀리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속에서 팽창되고 있다. 브루그만은 그 권력을 바로의 권력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구약성경을 진리와 권력의 대결로 읽는 새로운 독법을 제시한다.
그 권력에 물들어 버린 이가 있다. 솔로몬이다. 지혜로운 솔로몬으로 흔히들 알려져 있지만 그의 행보는 사실 출애굽 하기 전 바로와 비슷했다. 징세, 사치품들, 축첩, 무엇보다 '값싼'노동력 착취. 애굽의 압제를 떠올릴만큼 무자비했다. 심지어 하나님을 길들이기 위해 , 하나님을 박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성전을 그 어느때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었다.
하지만 진리는 제어되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 바로처럼, 모든 절대주의 왕정처럼 솔로몬 왕권은 영원히 유지될 수 없었다. '기만'과 '폭력'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던 솔로몬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지혜', '용맹', 그리고 '부'(wealth)가 있었다. 저자는 그 세 가지 요소가 예레미야가 말하는 '긍휼'(steadfast love), '정의'(justice), '공의(righteousness)'에 의해 반박되고 있다 말한다. 솔로몬의 탐욕에 의한 권력은 결국 나눔을 통한 정의를 통해 무너지게 될 것이다.ᅠ
이어 열왕기상,하에 대단히 독특하면서도 인상깊은 인물이 나온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다. 그 대머리 선지자는 인간들의 공동체를 변혁하기 위해 왕정의 감시 밖에서 살았다. 그는 절대왕정, 권력이 가지는 힘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진리를 말하는 능력"을 신뢰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다. 왕가의 역사와 대조적인 대항역사(counter-history)를 살아내며 권력을 위탁받았을 뿐, 사실 허수아비인 왕들의 실체를 폭로한다. 그는 왕들에게 도전하진 않지만 왕가의 지위를 전적으로 무시하며 자신의 변혁을 계속해 나간다. 진리란 그런 것이다. 진리란 죽은 권력에 대항해 계속해 살아 움직인다 라는 것을 엘리사는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몸은 심지어 죽어서도 생명을 주었다. 복음의 진리는 새로운 삶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151)
같은 열왕기하를 읽다보면 예루살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이 나온다. 그는 진리가 사라진 권력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그러나 저자는 그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사례로는 이미 솔로몬에서 다루었다. 저자가 주목하는 인물은 아합의 손자 요시야 왕이다. 그는 성전 개혁을 하며 오래된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옷을 찢었다. 회개하고 토라에 순종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는 개혁에 착수한다. 그 핵심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부채를 면해주는' 것이다.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하는 동시에 사회개혁을 한 것이다. 진리는 관념적이지 않고 공적인 진리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시야 왕에게서 돋보이는 놀라운 점은, 이미 그 자신이 권력이라는 것이다. 절대 왕정 속에서 자라났다. 사무엘상 8장 11절 이래로 몰수와 찬탈의 길이었던 '왕의 길들'에서 떠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182) 그러나 그는 떠났다. 예루살렘의 지배 엘리트들의 이데올로기였던 '억압'과 '폭력'에서 떠나 구약성경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정의'와 '공의'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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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브루그만은 성경의 내러티브를 위와 같이 성경의 네 인물, 모세, 솔로몬, 엘리사, 요시야를 '진리'와 '권력'의 대항관계 속에서 살아간 인물로 읽어낸다. 그리고 지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날 우리를 벌벌 떨게 하는 권력은 무엇이냐고. 아마 야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힘이겠다. 심지어 사람들의 시선 또한 우리에게 권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시 말한다. 우리를 억압하고 두렵게 만드는 모든 인간의 권력은 허구라고. 죽은 거라고. 진정으로 살아있는 힘, 권력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라라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진리는 공적 진리이며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공의'로 나타난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ᅠ
나니아 연대기가 떠오른다. 아슬란이 나타나기 전, 나니아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얼음 마녀였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절,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슬란이 나타나자 세상이 바뀌었다. 나니아의 얼음이 녹기 시작했고 점점 봄이 찾아왔다.그러면서 얼음마녀의 지배가 허구라는 것이 드러났다.ᅠ아슬란에게는 생명이 있었다.ᅠ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일거다. 우리를 옭아메는 모든 죽은 권력을 뿌리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생명의 진리가 외치는 대로,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며 살아가자고 노신학자는 목소리를 높여 우리를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도전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이미 죽은 것이 드러난 권력에 붙어 살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끝까지 읽게 되면 살아있는 진리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솟아 오른다. 부디 다른 독자들도 이 경험을 하길 바란다.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