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뿌리
조세희 지음 / 열화당 / 1985년 9월
평점 :
품절


그들은 좋은 말을 수없이 골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다음에 한 일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들이 한 많은 말은 간단히 다음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가 죄 지을 차례가 되었다!”

  • 12페이지.


조세희 작가의 산문과 단편 두 개, 직접 찍은 사진이 실린 사진-산문집.

79-80년대의 노동환경에 대한 여러 입장과 발언,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쓰고 있다. 

이 책은 1985년에 초판이 발간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이 현재의 노동환경에서 벗어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똑같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당장에 해결책을 찾지 못하더라도 조직된 힘으로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단편 두 개 중 하나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의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 정도로 봐도 좋겠다는 의견을 남겼다. 이 작품을 보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여운을 이어가도 되겠다.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사진과 3장에 남긴 사북사태 혹은 사북항쟁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가 직접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일단 미적으로 아름답다. 안정적인 구도, 80년대 눈 쌓인 탄광촌 사북 마을, 그 마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인도,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 외국에서 찍은 사진들도 아름다운 사진들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다. 필름 카메라로 찍어서일까, 안정적인 구도와 그 사진 한 컷에 담긴 이야기가 그냥 넘길 수 있는 페이지는 아니다. 한 장 한 장을 얼마나 공들여 찍었을지 상상이 된다. 

3장에서는 사진에 대한 설명을 붙이면서 본격적으로 사북항쟁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광부들이 직접 쓴 글로부터 사북사태 공소장까지 온전하게 기록되어 있다. 탄광과 광부라는 말이 낯설어진 오늘이지만, 사북에서 있었던 민영광산업체와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 사측으로부터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림 받은 어용노조의 일이 결코 과거의 일로만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현재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니까. 

이 일들을 기록하고 작가는 카를 야스퍼스의 말을 인용한다.


‘통치는 개개인의 직무이다’, ‘인간다운 인간들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개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과 불의, 특히 그 앞에서 또는 그가 알고 있는 가운데 저질러지는 범죄 행위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을 저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나는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같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 263페이지


야스퍼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책장을 덮으며 ‘침묵의 뿌리’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된다. 연대감. 연대감이 없다면 침묵하게 된다. 인간다운 감정,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감정, 그것이 없다면 사회구성원의 고통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산문의 마지막 장에서는 어떤 교사들이 직접 세운 학교를 언급하며 그들 교사가 해 준 말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들 교사들은 ‘자신을 어떤 조직의 일부가 아니라 한 세대의 일부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이 세운 학교의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가난한 자의 벗이 되고,

슬퍼하는 자의 새 소망이 되어라.”

- 137페이지


이 책에는 사북 어린이들이 직접 쓴 글들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5학년 이진희 어린이가 쓴 글은 가슴이 뭉클했다.

수업 도중에 학교 건물에 금이 가고 벽이 무너져 실내에서 수업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아이들은 천막을 치고 수업을 들었는데, 찬 바람이 불어 더 이상 실외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자 무너지고 갈라진 학교로 돌아가 수업을 받게 된다. 아이는 학교가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다섯 군데로 나누어진 모습이.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학교가 그렇게 된 이유는..

“석탄을 많이 캐내기 위해 학교 밑까지 굴을 파들어갔기 때문이지요.” 이다.

그 석탄을 팔아서 민영광산회사 동원의 회장은 2천억원이 넘는 재산을 축적했다. 

광산노동자들은 월 평균임금 155,700원을 5인 가족 최저 생계비에 도달할 수 있게 42.75% 인상된 241,200원 선으로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어용노조와 사측은 20% 인상선에서 협상을 해버렸고 이는 사북사태의 원인이 되었다.


누구의 벗이 되어야 하는가?

침묵은 누구를 위한 것이겠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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