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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ㅣ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가 쓴 9편의 단편소설 작품집.
이 소설집은 몇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 첫째, 생소한 캐나다 작가의 소설. 캐나다에서 연상되는 건 ‘빨강 머리 앤’ 밖에 없는데, 앨리스 먼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캐나다에서도 권위 있는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사람이라고 한다. 둘째, 두껍고 지루한데 마지막에 반전을 주듯 번쩍하고 드러나는 삶과 인연의 이치에 작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느낌을 준다. 셋째, 인물들이 악착같이 움직이지도 않고 무언가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 넷째, 소설 속 화자가 자주 바뀌는데도 감정과 내용을 따라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 다섯째, ‘정상가족’이나 ‘정상관계’의 범주에 머무르는 사람이 없다는 점.
각각의 단편 속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본분에 맞지 않는 어긋난 욕망에 놓이는데 그들은 그 상황에 침착하고 온전하게 자신을 올려놓는다. 그 상황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아나 자신의 욕망이 아니다. 병에 걸린 타인을 보살피고, 결정권을 내어주고, 혹여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마저 상대가 원하는 사람에게 내어주는 ‘양보’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얻게 되는 것은 정열이나 불꽃같은 삶은 아닐지라도 살아가는 동안 은근하게 자신을 지탱해 줄 경험이고 기억이다. 그 담담한 인정 속에서, 종국에 가장 염려하고 연민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잔잔해 보이지만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들은 살아온 길을 뒤흔들어 놓을 만한 것들이다. 의젓하게 사건을 마주하는 인물들은 운명과 인생, 존재론, 간직하는 사랑, 진정한 사랑, 헌신, 희생 같은 것들을 깨닫게 된다.
거창하지 않게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종국에 인간이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감정, 인생에서 꼭 거쳐가야 할 과정을 보여주기에 이 소설집은 결국 긴 여운을 남긴다.
어떤 작품은 인생의 아이러니에 박하사탕을 깨문 듯하고, 어떤 작품은 사랑에 대한 태도를 반성하게 하고, 어떤 작품은 봉인하고 마는 기억에 대해 스스로를 다독이게도 만든다.
놀랍도록 지루하고 놀랍도록 반전을 주는 놀라운 작품들이다.
알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 내 앞에 그리고 너의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를…… - P78
그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그 삶을 더 좋아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다른 종류의 삶 역시 나름의 함정과 성공을 포함한 또 하나의 탐구에 불과했으리라는 생각이 그녀에게 떠올랐다. (중략) 다른 삶이라고 해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계속해서 같은 것만을 다시, 또다시 발견하게 되었을지도. 명백한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불안정한 자신에 대한 그런 진실들. 그녀가 자신에 대해 발견한 진실은 어떤 신중함, 최소한 경제적인 감정 통제라고 할 만한 그 무엇이 한평생 자신을 지배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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