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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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하고 당혹스럽고 두꺼운 책.

페르난두 페소아가 그의 여러 헤테로님 중 하나인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로 분해 쓴 ‘사실 없는 자서전’이다. 일기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한 이 책은 여러 해설과 주석이 붙을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것에 대해서 적기로 한다.

이 책은 내 머릿속의 언어와 어휘를 모두 해체시켜 버린다. 추상과 구체를 마구 오가면서 사색하는 화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명제, 일반적 범주의 사색이 아니라 전복시키고 돌아보는 사색을 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이 글을 길게 읽다 보면 허무해지기도 한다. 책의 제목이 왜 불안의 서일까. 허무의 서가 더 어울릴 법한 내용인데. 그것은 무욕과 허무와 체념의 화자가 그럼에도 삶을 부정하지 않고 생생히 존재하는 꽃잎처럼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 생생한 삶과 화자의 사색이 주는 간극은 결국 존재의 불안이라는 감정을 자아낸다.

아포리즘으로 활용할 수 없지만, 자꾸 밑줄 긋게 된다. 상식과 진부한 느낌을 전복시키다 보니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아포리즘으로 몇몇 구절이 떠돌아다니게 된다면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방해될 수 있어 보인다. 아포리즘 자체에 부정적이지만 이 책은 그 위험성이 더 커 보인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무책임. 그 무책임한 용기가 마음에 든다. 느낀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때 느꼈으나 기록할 수 없다는 말을 쓰는 것. 그것은 시인이기 때문에 이런 사실 없는 자서전을 쓰고 꿈 없는 꿈을 꾸는 시인이기에 가능해 보인다.

읽는 내내 사실은 내가 이 책을 왜 읽고 있을까 의구심에 빠지곤 했다. 지식으로 쌓을 것도 아니며, 대공감을 일으키는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끝까지 읽게 만든다. 그것은 자신 안으로 가장 깊이 침잠했던 시인. 그 침잠 속에서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한데도 아무것도 표현해내지 못한데도 실패한 것이 아니란 생각에 공감해서다. 몽상가가 되어도, 생각 없는 생각에 잠겨 있어도, 남들은 생각하는 줄 알겠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부정될 수 없다.

시인들의 글을 읽을 때 행복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을 느낌을 그들이 대신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무릎을 치며 공감하고,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것만 같던 나의 외로운 생각은 지원군을 얻는 느낌인 것이다. 페소아는 그런 면에서 스스로를 비생산적 인간이라 생각하는 내게 든든한 원군이 되어준다.

깊이 침잠해서 생각의 방향을 잃었을 때, 그 우물에서 무엇도 끓어 올리지 못했을 때 나는 다시 이 책을 꺼내 읽을 것 같다. 나보다 앞서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향했던 이, 그 결과물을 궤짝에 아무렇게나 남겼던 이, 생각의 지도를 스스로 그려보았던 이. 그를 생각하며 내 생각의 지도를 새로 그려나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참, 이 책의 좋은 점 중 하나.

배수아 작가가 번역하고 김소연 시인이 발문을 붙였다는 것도 아주 큰 매력이다.

모든 것을 생전 처음인 듯이 감각하기.

인생의 신비를 종말론적으로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꽃잎을 직접 만지며 감각하기. - P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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