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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의 방 - 2019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진유라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환갑도 안 된 겨우 쉰세 살의 무해. 그녀는 '초로기 치매'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세상 풍경 밖으로 저만치 밀려나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21-22쪽) 무해의 방, 그곳 깊고 깊은 어딘가 존재하고 있었던 기억의 파편들을 기록한 책이다. 단순한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극한의 상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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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지만 소설은 읽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 것은 헛된 일이라 여겼으니. 그저 드라마를 챙겨보듯 유흥을 목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해였음을. 어쩌면 나는 그동안 소설다운 소설을 만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기억은 왜곡되고 재구성되기 때문에 기록보다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기억이 만들어낸 허구는 기록보다 훨씬 진실했다. 기억 중에서 왜곡된 바로 그 지점은 결국 자신이 대상과 사물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은지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170-171쪽) 저자의 글을 빌려와 말하자면, 이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진실했다. 현실보다 더 현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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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와 '탈북', 이 조합이 신선했다. 하나의 음식을 완성하듯 각각의 재료로 스토리를 만들어낸 저자의 요리솜씨는 탁월했다. 특히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도려내는 저자의 날카로운 필력은 탐이 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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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무해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상실의 종류를 안겨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211쪽)고 고백한다. 저자는 '무해(誣害 : 거짓으로 꾸며 해롭게 함. 또는 그런일)'로 자신의 지독한 상실감을 견뎌낸 것은 아닐까. 소설을 쓰면서 저자의 삶은 더 단단해졌으리라. 이 소설을 읽는 이들의 삶도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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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 그녀는 하루하루 투쟁하듯 살아왔다. 무해(無害 : 해로움이 없음)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찬 삶이었다. 잔혹하게도. 삶의 나침반은 이미 죽음을 향하고 있지만 삶의 끝나는 순간까지 그녀는 사투를 벌일 거다. "압록강을 건널 때는 절반의 행운과 절반의 불운이 있었다. 사느냐, 죽느냐. 하지만 치매는 압록강을 건널 때와는 달리, 명료했다. 매일 기억을 잃어가며 서서히 죽어가는 병. 절반의 행운 같은 건 없고, 확실하게 흔들림 없이 죽어가는 병. 그게 바로 치매였다. 죽을 날을 받아놓고 보니, 그제야 인생이 막 작동되었다."(30쪽) 어쩌면 노년은 쇠퇴기가 아닌 절정기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클라이맥스(climax : 갈등이 최고조로 이르는 단계). 이 늙음과 죽음은 우리에게 그리 멀지 않은 미래다. 무해의 방을 통해 우리는 그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삶의 '예고편'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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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마따나 무해의 '완벽한 이야기'는 경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기에 '공감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보편성 덕분인지 그녀의 방은 낯설지 않다. "당시, 그녀는 자신이 겪은 경험들은 대단한 일들이며,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다 하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176쪽) 이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녀의 방을 들여다 보길. 연민을 갖든 위로를 받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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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금 이 순간, 상실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 "말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기억'들이 있었다. 말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감정'들이 있었다."(36쪽) 당신에게도 그런 기억, 그런 감정이 있지 않은가. 당신의 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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