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 100년 후에도 희망이 되는 기독교를 위하여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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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기독교는 희망일까, 절망일까? 인류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을 근거로 늘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희망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발견한 희망을 전달하는 자들로 살아왔다. 그러나 2020년 기독교는 과연 희망인가. 절망인가. 책의 제목처럼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될 수 없을지라도, 해답으로 가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김형석 교수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 지성으로 100세의 나이에도 꾸준히 저술, 강연 등의 활동을 통해 기독교 뿐 아니라 사회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살아오셨다.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100세 할아버지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명쾌한 구석들이 많기 때문에 읽는 내내 그 연세에 어찌 이런 총기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육체를 만드는 것이겠다는 생각도 함께 했다.  


저자는 기독교 전반에 뿌리 깊은 문제의 핵심을 날카롭게 지적할 뿐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관점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유일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는 그 종교적인 특징에서 배타성, 폐쇄성은 자연스러운 열매였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관점으로 접근할 때, 그 나라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갈 것이고 복음의 전파와 선교에 있어서 그 대상에 제한이 있을 수 없으므로 오히려 그 경계는 허물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인간다움을 회복할 것과 민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김형석 교수의 주문은 현대의 모든 교회가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다. 


특별히 글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인간애, 사랑을 통해 완성하는 정의, 사랑의 경쟁을 통한 성장 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아마도 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수 있고, 사랑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내려주어야 할 기독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뼈아픈 반성일 수 있다. 기독교는 (아직) 희망이 있는가에 대한 답은 어쩌면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종교로 거듭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기독교가 세상에 희망을 주려면그리스도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져야  것이다 뜻이 무언가하나님을 사랑함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고사랑 안에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그리고  만물이  나라 안에서 화합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뜻이 아닐까우리가 전할  있는 희망은 바로  나라의 회복이지 않을까 싶다기독교 자체가 희망이  수는 없다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시고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부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유일한 희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소개할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두란노 #김형석 #기독교아직희망이있는가 #목회자서평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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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만나거든 - 현실과 씨름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야고보의 지혜
박대영 지음 / 두란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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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영, <시험을 만나거든>, 두란노, 2020


마르틴 루터는 신약성경 목록 가운데서 야고보서를 제외하길 원했다. 그럴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와 대척점에 있는 행위구원을 옹호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낼 문제는 아니지만,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를 발견하고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던 마르틴 루터에게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메시지는 행위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적잖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행위없이 말만 남은 신앙이 얼마나 매력을 잃고 힘없이 걷도는지 말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은 순종을 낳게 한다는(롬1:5) 로마서 서두의 선포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로마서 12장 이후의 성도의 삶을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맥락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믿음과 순종(행함)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로, 하나인 것이다.


박대영 목사는 야고보서를 소화하면 소화할수록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메시지에서 모순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추구하는 동일한 방향성을 볼 수 있고, 나아가 내용 면에서 서로를 충실히 보완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행함은 믿음을 온전하게 한다. 야고보서는 현실의 시험 가운데 빠져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인내함으로 이겨낼 것을 주문하면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은 행함이라는 망치를 통해서 다듬어 가는 것이다.


강해집이라고 하고서 저자의 풍성한 묵상집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닉네임을 ‘제임스’로 정할 만큼 야고보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박대영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집 <시험을 만나거든>은 무려 30년 이상을 깊은 묵상과 주해로 다져놓은 회심작이라 할 수 있다. 원문과 단어의 의미를 톺아보면서 그 의미의 풍성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어떻게 이겨 나갈 것인지에 대한 지혜가 듬뿍 담겨 있다. 박대영 목사는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어떤 괴로움이나 상실도 쓸모없지 않다.” p. 53


아멘이다. 주변에 어떤 위로로도 쉬이 회복되기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박대영 목사가 정의하는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사람”들이다. 어떤 역경이 있다 하더라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과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들, 성령보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으려애쓰는, “기다림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혹여 심한 고난 가운데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야고보서’를 깊이 묵상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그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할 좋은 도구로 <시험을 만나거든>을 추천한다. 


#박대영 #시험을만나거든 #야고보서강해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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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는 법 - 분별과 은혜
김형익 지음 / 두란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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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익, <설교 듣는 법>, 두란노 2020



  매주일이면 예배를 위해 교회로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어떤 면에서는 예배 자체에 큰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한 행렬로 보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분석이 아닐까 싶다. ‘예배=설교’라는 등식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특성상 교회와 예배의 중심에 ‘설교’가 있다는 현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목회자의 능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능력을 꼽으라면 ‘설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설교자)의 권위는 자신의 설교역량에서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설교를 잘하지 못하는 목사에게 권위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짚고 있는 문제의식은 설교자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목회자들은 후보생 때부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설교하는 법을 배우는 만큼, 설교를 듣는 방법에 대해서는 배울 일이 잘 없다. 설교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바른 가르침에 무게가 실리는 반면, 성도들의 설교 듣기에 관해서는 ‘그냥 잘 들어야 함’을 강제에 가깝도록 강요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설교에 있어서 좋은 설교자만큼이나 좋은 청중도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균형을 말한다.


  신앙생활을 평균적으로 60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매주 1회씩만 설교를 들어도 죽기까지 약 3,000회 이상의 설교를 듣게 된다. 듣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다. 또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믿음을 배양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듣기인 것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 듯이 ‘들음’ 자체를 방해하는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설교 듣는 법’을 배워야 하는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잘 듣는 것이 신자의 구원과 밀접한 연관되기 때문이다. 듣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오늘 내 영혼의 상태는 설교를 들으면서 일어난 반응이 축적된 결과다” p.53


  인생이라는 것도 수많은 말들의 축적의 결과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신앙의 상태가 설교 듣기의 축적된 결과라고 한다면, 인생은 내 삶에 스쳐간 수많은 말들의 축적이 빚어낸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들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 나아가 ‘어떻게 들을 것인가?’를 이해하는 일은 내 삶과 신앙을 결정짓는 극적인 요소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듣기로 작정한 자들이며,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겠다는 말의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임무는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전달하는 일이며, 청중(설교자를 포함한)에게 주어진 임무는 선포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들은 대로 바로 살아가는 데 전심전력하는 일이다. 좋은 설교자는 좋은 청중들이 만들어 가며, 좋은 설교자가 세워질 때에 청중들이 유익을 누릴 수 있다. 한국교회에 이러한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전하는 이나, 듣는 이나 겸손한 심정으로 ‘듣는 일’이 먼저 될 때 가능한 일이라 믿는다. 바른 설교자 김형익 목사의 진심어린 조언을 귀담아 듣는다면 ‘듣는 자’로서의 바른 자세를 배우게 될 것이며, 신앙생활의 큰 유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설교듣는법 #김형식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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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진심 - 산상수훈을 통해 듣는
스카이 제서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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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피플 2기 목회자 서평 그룹에 선정되어 10개월 동안(2020. 9 ~ 2021. 7) 활동하게 되었다. 9월 서평도서는 스카이 제서니 목사의 <예수님의 진심>이다. 독자로서 출판사를 통해 흥미로운 저자를 소개받는 일은 참 즐겁다. 물론 소개팅이 무조건 아름다운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듯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맛이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예수님의 산상수훈(마5-7장)을 다룬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신약의 귀중한 유산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이 기독교 안팎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혹여 ‘산상수훈’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산상수훈에는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유명한 대목들이 줄을 잇는다. 팔복, 빛과 소금, 주기도문, 황금률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롤로그의 문제제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삶의 길이 바빠 예수의 말을 무시하며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 모든 사람이 각자 삶의 길을 걷느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무시한다. 흔히 인생 여정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하는데, 언제 마칠지 모를 인생 여정을 마치 9.53초 후면 도착할 것처럼, 100미터 트랙을 뛰듯이 숨 가삐 달린다. 그러니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다. 무호흡으로 달리면 소리마저 먹힌다. 가까이서 손짓하는 예수가 보일 리 만무하고, 애타게 부르는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길을 걷지만 길을 잃은 상태고, 피곤하지만 멈출 수도 없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그리 바쁜가. god 형님들의 노랫말을 떠올려보자.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알 수 없다면 짚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너무 바삐 달리느라 내가 걷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서두르는 건 아닌지, 잠시 서서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코로나19가 우리의 숨 가쁜 현실에 강제휴식?을 부여했다. 이때에, 산상수훈에 담긴 “예수님의 진심”을 헤아려 보면서 스스로의 길을 점검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구성은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으나 현대인들의 특성을 감안한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5-7장의 본문을 강해식 해설을 붙였다면 절대 이 분량 안에서 해결할 수가 없다. 저자는 5-7장의 분량을 총 9개 장, 74개의 짧은 묵상으로 나눠 넣었다. 특징은 각 묵상마다 채 3페이지가 안 될 정도의 간명한 분량으로 정리했을 뿐 아니라, 매 묵상마다 한눈에 정리되는 감각적인 삽화를 실었다. 그리고 각 묵상의 마지막에는 참고 성경구절을 덧붙여두어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다. 책을 잘 활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읽어갈 것을 제안한다. 


  일단 눈에 거슬리는 삽화는 건너뛰어라. 먼저 글의 내용을 읽고 소화한 다음, 참고 성경본문을 읽으면 이해가 깊어진다. 그런 뒤에 삽화로 마무리하면 글의 내용이 이미지화되어 각인되는 효과가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줄 치며 볼 만큼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삽화의 강점이 드러난다. 일독을 한 후에는 그냥 삽화만 쭉 훑어도 내용이 대강 기억이 날 정도다. 삽화는 그런 도구로 쓰인다. 처음에는 읽어라. 그리고 삽화로 글을 정리하라. 간혹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삽화만 넘겨도, 마음에 걸려드는 메시지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바쁜 현대인들의 삶의 문화를 읽어낸 맞춤형 글쓰기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서평은 이 책의 타깃 독자층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글일 것이다. 길고 장황하다. 길지 않아야 빠르게 읽을 수 있고, 어렵지 않아야 머물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글의 이미지화는 글을 정리하도록 돕는다. 물론 어떤 글은 머물러서 숙고해야 할 만한 ‘좋은’ 글들이 있다. 그러나 세상은 명문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때로는 좋은 글감으로 쓰이기도 하고, 긴 호흡으로 글을 대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세상이 그다지 많지 않다.


  아울러 한 가지 염려는, 이 책은 똑똑한 신학생들 혹은 목회자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을 만하다. 엄청난 인사이트를 담고 있거나 특별히 깊이 있는 해석을 던져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짚어야 할 것은 유별난 문장만 찾아 헤매는 사람 치고, 그 문장을 제대로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책을 대충 훑어보고 혀를 끌끌 차기 전에, ‘나도 이렇게 쉬운 글을 쓸 수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어려운 글쓰기를 못해서 이런 쉬운 책을 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쉬운 책이 아니라, ‘쉽게 쓴’ 책이다. 책날개에 기록된 그의 이력만 보아도 웬만한 사람들에게 글쓰기 지적을 받을 만한 이력은 아니다. 게다가 많은 한국 신학생들, 목회자들이 가고 싶어 하는 유력 신학교에서 공부도 마쳤다. 저자는 철저하게 “삶의 길이 바빠 예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좋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좋다’ 말하지 않는다. ‘사납다’라고 한다. 아마도 어렵고 길어질 수밖에 없는 글을, 간결하고 짧게 정리해낼 수 있는 능력을 ‘실력’이라고 말할 것이다. 스카이 제서니는 확실히 실력 있는 저자다. 스카이 제서니의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진심에 대해서도 묵상하게 하지만, 짧고 간결한 글에 어떻게 심오한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배우게 한다. 짧고 쉽게 쓴 글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닿았던 글귀를 소개하고 서평을 마치려고 한다.


우리가 좁은 길로 가는 것은 그 길이 쉬워서도 아니요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어서도 아니다. 단순히 넓은 길이 멸망으로 이어지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좁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p.222

  그렇다. 바쁘게 뛰는 현실에, 큰 길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좁은 길을 찾는 이유는 쉬워서도 아니요,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 길이 예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 끝에 주님이 서 계신다. 개인적으로는 이 한 문장을 건진 것만으로도 책값은 다 했다. 모르긴 몰라도 산상수훈을 통해 전하는 예수님의 진심은 ‘그 길을 함께 걷자’는 위로이지 않을까.


#예수님의진심 #스카이제서니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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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품은 신약 본문 해석
김경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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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품은 신약 본문 해석>, 김경식, 새물결플러스, 2020

 

<구약을 품은 신약 본문 해석>의 저자 김경식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는 이미 국내에서 신약의 구약 사용이라는 연구분야의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신약의 구약 사용연구는 최근 학계에서 가장 활기를 띄는 연구영역이라고 한다. 지금도 수많은 연구 논문과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고 있다. 국내에도 리처드 헤이스, 그레고리 비일, 스티브 모이스와 같은 학자들의 책들이 출간된 바 있고 주석 시리즈도 있으니 참고할 만한 도구들이 벌써 많은 셈이다.

 

그러나 학계의 활발한 연구활동과는 별개로, 성도는 물론이요 목회자들에게도 신약의 구약 사용은 익숙하지 않은 주제다.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간다는 식의 설명에는 익숙하지만 그 연속성을 설명하는 데는 취약하다. 신약의 저자들이 어떤 의도로 구약성경 본문을 인용, 암시, 반향의 형식으로 활용했는지, 그리고 인용, 암시, 반향은 신약의 본문에서 어떻게 해석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일반화시켜 송구하다. 그렇게 써야 문제가 커보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목회자들의 성경해석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와 성도들의 잠들었던 호기심을 흔들어 깨우기에 적합한 자명종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개념은 상호본문성(간본문성, 상호텍스트성 등과 같이 번역이 완전 통일되지는 않음)’문맥이다. ‘상호본문성은 현대 문학이론에서 차용한 개념으로, 서로 다른 텍스트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의 본문을 인용, 암시, 반향으로 활용하는 가운데, 어떻게 그 의미들이 드러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구약성경의 문맥’에 대한 이해. 때로는 상호본문성을 가지는 구절의 인접 문맥뿐 아니라 책 전체를 살펴봐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야 신약 저자의 구약 사용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바른 해석은 해석자의 성실함이 담보될 때라야 순도를 갖추게 된다.

 

책에서 든 비유 두 가지로 신약의 구약 사용 연구의 중요성은 명확해진다. 첫째는 빙산의 일각비유다. ‘빙산의 일각이란 신약의 구약 인용 본문은 수면 위로 떠 오른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드러난 빙산의 봉우리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면, 수면 아래에 숨겨진 진또배기 빙산의 모습은 보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나 신약 본문의 의미와 인용된 구약 본문의 의미가 명확하게 연관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는 성급한 해석이 곧 나쁜 해석이 되고 만다. 그러니 수면 아래에 있는 빙산을 찾아 헤매는 일, 즉 인용, 암시, 반향된 구약 본문의 문맥을 살피고 그 의미를 연결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둘째는 심긴 씨앗비유다. ‘심긴 씨앗은 이미 인용된 구약 본문 안에 의미의 씨앗이 심겨진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그 씨앗은 신약으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만큼 발전성을 갖는데 즉,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구약으로부터 씨앗을 이어받은 신약 본문은 인용한 구약 본문과 동떨어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 씨앗을 찾기만 한다면, 해석자의 필요에 따라 변하는 돌연변이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이다.

 

책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 정리될 수 있다. 그리고 책의 제목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구약을 품은 것이지 삼킨 것이 아니다.” p.339

 

이 문장에 대한 학술적 논증은 1부에서 바울의 것을, 2부에서는 요한의 것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참고하면서 큰 유익을 얻은 것으로 만족한다. 부디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이 책이 읽힘으로써, 느닷없는 해석으로 성경본문의 의미를 왜곡-곡해하는 일이 줄었으면 한다. 바른 해석이 바른 적용을 낳기 때문이다. 어떻든 소화는 나부터 잘 시켜야겠다. 아직 내게 너무 과한 음식이었는지 속이 좀 더부룩하다. 그럼에도 좋은 책을 써주시고, 내주신 김경식 교수님과 새물결플러스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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