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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한 권으로 읽는 역사 (한영 합본)
헬렌 K. 본드 지음, 이학영 옮김 / 도서출판 학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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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한 권으로 읽는 역사> (한영 합본)

헬렌 본드, 이학영 옮김, 도서출판 학영, 2020.


  신생출판사 '도서출판 학영'의 첫 책, 헬렌 본드의 <예수: 한 권으로 읽는 역사>는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의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입문서라기보다는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론을 사용하여 그려낸 '예수' 소개서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애초에 원서가 그러한 의도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100페이지가 안 되는 얇은 분량의 책이다. 이 책과 같은 시리즈의 책으로, 새물결플러스에서 역간한 존 바클레이의 <단숨에 읽는 바울>이 있다. 앞으로도 해당 시리즈의 책들이 꾸준히 번역될 예정이라고 하니 독자들은 기대해볼 만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예수'라고 하는 유대인 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의 주요 관심이 '인간 예수'를 드러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인물이 살았던 시대, 문화, 환경, 정황 등을 당대의 문헌과 고고학적 사료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규명해나간다.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 예수를 신뢰할 만한 인물로 재구성하려는 작업이 역사적 예수 연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의 구성 1부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역사적 정황,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과 Q자료를 토대로 구성해 낸 예수를 그려주고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근본주의 내지 복음주의의 강력한 영향으로 '참 하나님이신 예수와 참 사람이신 예수'라는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 교리를 강조하면서 예수를 '신인(神人)'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참 하나님이신 예수에 대한 해석은 분명하게 강조되지만, 참 사람이신 예수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예수에 대한 교리적 설명은 균형감을 드러내나, 그것에 대한 해석은 균형감을 상실한 것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분야가 근본주의 내지 복음주의권 신학의 보수적 성향과 교류되기 힘든 부분들도 있어보인다. 그러나 참 사람이신 예수에 대한 해석의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를 경청해보는 것이 기본이요, 바람직한 태도라고 지적해야겠다.


  2부에서는 예수가 남긴 유산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사상은 예수가 탄생한 이래로 꾸준히 꿈꾸었고, 전파하려고자 했던 체제전복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가져다준 파급력은 2천년의 역사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유산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역사적 예수 연구가 갖는 의의가 적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그 시대의 예수를 재구성하는 일이 꼭 필요한 이유는 현대인의 현대적 해석의 틀로 예수를 이해하게 될 때 생기는 간격은 자주 오해나 왜곡을 일으킬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해석적 틀을 배제하고, 당시대의 있는 그대로의 예수를 보여줌으로써, 보다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선명함을 짚어내려고 하는 의도가 있지 않나 싶다. 현대의 독자들은 그렇게 예수를 인식하고 읽어감으로써 좀 더 예수의 메시지에 '직접적'으로 가 닿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특별히 이 책이 갖고 있는 특징이자 장점을 꼽자면 출판사 대표의 사려깊은 배려와 아이디어가 묻어 난다는 것이다. 사려깊은 배려라면, 이 책을 읽는 독자층이 대부분 신학생 내지는 목회자일 것을 감안하여 목회자의 영어공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원서 원문을 실어주었다는 것이다. 한글번역문이 약 100페이지, 영어 원서가 약 90여 페이지 되는 듯하다. 이것을 편집에서 아이디어를 활용했는데, '리버스북' 형태로 출간했다. 대개는 영한대역의 경우 양쪽 페이지에 번역문과 원서가 나란히 배치되는데 반해, '리버스북' 형태는 책을 정본으로 읽어가면 번역서가, 책을 거꾸로 뒤집어 읽어가면 원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신학과 영어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받은 셈이다.


  좋은 소식은 유튜브에서 <영어대장 티처킴>을 검색하면, 영어고수 김태훈 목사님께서 진행하는 <예수, 원서 읽기>가 한창이다. 재미있게, 일타강사 수준으로 짚어가면서 읽어주시기 때문에 이해를 못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무료로 공개하시니 이만한 기회가 또 없다. 그냥 한 권씩 사들고 유튜브 시청만 해간다 하더라도 책값의 10배 이상일 것이다. 목회자, 신학생들 뿐 아니라, 예수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 한 권씩 구입해서 인간 예수의 면모를 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보수적인 신앙 토대를 갖고 있는데, 나름 재미있게 읽었으니 안심하고 읽어가도 좋을 것 같다. 


  다만 거슬리는 지점 하나를 언급하면, 간혹 보이는 오타가 조금 치명적이긴 하다. 주전 4년을 주전 4세기로 표기하는 등의 오타가 몇 군데 발견된다. 신생출판사의 귀여운 실수라고 치고, 책이 많이 팔려서 2쇄를 찍을 때는 잘 수정되어서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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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 가다
양혜원 지음 / 비아토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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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원 <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가다>

 

교회 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교회언니, 양혜원님은 작가로서보다 번역가로 먼저 알고 있었다. 그간 약 90여권의 외서 번역을 했고, 특히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과 같이 국내에도 잘 알려진 개신교 외국저자들의 전문번역가로 익숙한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로 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던 듯하고, 이후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이라는 책을 추가로 내놓게 되면서 한국 복음주의권에 페미니즘 화두를 던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페미니즘이 뭔지도 잘 몰랐다. 어줍잖게 주워들은 잡지식이 전부였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교회의 암울한 그림자인 근본주의적 보수개신교의 강렬한 저항 때문에라도 향후 동성애’, ‘페미니즘과 같은 젠더이슈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논쟁이 불가피한 영역이리라 짐작된다. 벌써 차별금지법 이슈로 개신교 내에서도 법률 해석과 적용을 두고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이제는 젠더이슈를 주요하게 다루지 않으면 시대착오적인 꼰대집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에 딱 좋다.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도 이러한 첨예한 주제에 관한 이해는 시대적으로 시급하다 하겠다.

 

누가 읽어야 할까. 이 책은 나같은 사람이 읽으면 제격이다. 페미니즘이 뭐지? 하는 사람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유교, 기독교적 문화에 익숙한 사내들, 혹은 여성들이 입문으로 읽으면서 기독교와 페미니즘이 함께 할 수 있는가? 함께 한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물론 설득력이라는 기준이 개인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균형미가 느껴지는 글로 읽혔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 상하지 않고읽었다면,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저자는 한국교회와 개신교인들이 흔히 실수하는 대목을 잘 짚어준다. 주지해야 될 현실은 유례없이 급성장한 한국개신교는 불교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인정받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여전히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라는 지위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마치 한국에서 주류 종교로 전제하고 해석, 접근한다면 제대로 헛다리 짚는 것일 수 있다. 현실인식부터 정직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기독교라는 용어보다는 종교라는 일반적인 개념과 용어들을 넓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기독교에서 한발짝 떨어져 최대한 객관적인 글쓰기를 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다분히 느껴진다.

 

이 책의 장점이라 할 것도 위의 부분과 연결된다. 기독교인이면서, 여성인 종교여성학자가 종교(기독교)와 페미니즘을 한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하려 했다는 점이다. 본인이 기독교인이면서도 기독교를 종교라는 범주에 넣고, 보다 객관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설정은 지혜로웠고, 여성이면서도 페미니스트들이 가진 오류들을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해명하면서 균형감있게 정리해내고 있다. 이런 류의 해설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신뢰를 부른다. 설득력의 비결은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탄탄한 논리와 근거로 서술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소위 내 이야기의 근거를 대기 위해서 편향적인 입장과 근거로 의견을 개진하게 되면, 같은 편 입장에서도 볼성사납고 피곤해지는 꼴을 보게 되는데, 그런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기술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던 챕터는 1장 서론과 4장 결론부였는데, 1장은 소위 페미니스트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짚어준다. 페미니즘의 기원과 주장에 관한 기본 개념 정리가 탁월하다. 4장의 결론부에서 자유/해방주의 페미니즘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한국 복음주의 페미니즘 과제로 넘겨 해결해보려는 시도들이 신선하게 와닿았다. 아울러 서구 사회에서의 주요 이슈들을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한국의 종교-문화적 요소에 대한 이해 위에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효과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중국 짜장미엔과 한국의 짜장면의 맛이 다른 것처럼, 베트남의 쌀국수와 한국의 쌀국수가 다른 맛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서구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던 기독교가 동양의 한국에 유입되어 한국형 기독교로 정착하기까지, 그리고 그 안에서 종교-문화적 요소가 서로 융합하며 드러나게 된 한국기독교의 페미니즘 문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 합당하다. 그동안 여성의 역할과 지위, 권리, 억눌린 삶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편향되어 있었는지, 또 그것이 해소, 해방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무리한 주장들이 있어왔는지도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여성에게만 불합리하게, 균형없이 들이대는 잣대, 불합리, 불균형을 바로 잡는 일에 한국 기독교가, 또한 복음주의 페미니즘이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양혜원님의 여성 3부작은 다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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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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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 2020)

 

살면서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를 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나마 학부에서 윤리교육을 전공한 이력 덕에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선이해가 완전히 낯설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만 낯설지 않았을 뿐,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공리주의를 주장했던 사회사상가 정도를 제외하면 건질 만한 게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서평단 이벤트는 당시 허접하게 했던 공부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실업계 고교를 졸업했고, 대학은 수시로 입학했기 때문에 윤리라는 과목 자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웠어야 할 효용(utility)의 원리를 대학가서야 처음 들어보게 되었고, 제레미 벤담이 주장한 양적 공리주의 원리로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원리가 제법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한편 기독교인으로서 금욕주의적(?) 정체성 때문인지, ‘행복과 쾌락을 맹종하는 듯한 공리주의의 타락한(?) 정체성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던 기억도 상존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공리주의에 대한 나의 이해가 편견이었거나 잘못된 지식에서 기인했다는 결론을 냈다. 기본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은 내가 평가할 만한 수준의 인물이 아니다. ‘천재. 그리스도를 사람 가운데 가장 선령한 사람으로 이해한 그의 빛나는(?) 지성에 아쉬운 감정이 남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라는 개념에서 큰 영향을 받은 밀은 제레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질적 공리주의 혹은 질적 쾌락주의로 발전시켰다. 공리주의의 쾌락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쾌락을 단순화하여 해석한다는 것이다. 마치 공리주의가 좇는 쾌락이 동물의 쾌락과 다를 바 없다는 식의 이해는 쾌락의 질적인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이때 등장하는 명문이 바로 만족스러운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낫다이다. ‘만족하는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훨씬 낫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이미 쾌락을 질적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회의 쾌락(행복)을 양적으로 극대화시키려는 벤담의 시도에서, 행복의 질적인 향상으로 나아가려는 밀의 지성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현대지성에서 출판한 <공리주의>의 장점만 세 가지 정도로 소개하고 마무리하면 좋겠다. 첫째, 이종인 번역자의 번역이 안정감있다. 밀의 <공리주의>가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어렵지 않게 읽혔다면 번역이 깔끔하고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외국 저자, 특히 철학, 사상적인 내용을 담을 때는 역자 의존도가 굉장히 높은데 번역이 깨롬하면 책을 덮는 경우도 많다. 둘째, 역자의 해제는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인물과 <공리주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 그리고 밀의 본문에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법한 알맹이들을 잘 짚어주고 있다. 내가 사는 시대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책을 만나게 될 때 가장 불안한 지점 가운데 하나는 텍스트는 읽히면서도 컨텍스트가 불안정해서 일어나는 이해의 어려움이다. 나의 컨텍스트를 그 시대에 곧장 대입해서 읽게 되면 아주 큰 오류를 부른다. 성경읽기가 어려운 이유도 그러하다. 그러나 해제 덕분에 그런 어려움은 일순 줄여준다. 마지막으로, 대화 형식으로 달아놓은 해설이다. 딱딱한 <공리주의>를 말랑말랑하게 재해석 해놓았다. 대화 형식으로 재미도 있고 이해도 쉽도록 구성했다. 모두 이종인 역자의 작품이다. 어려운 책 하나를 좋은 출판사와 역자를 통해서 맛나게 먹었다. 감사하다.

 

굳이 단점이라고 하면, 살기 바쁜 사람들이 읽기에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한 그런 천재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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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태도 - 행복한 이기주의자로 평생 살아보니 알게 된 것들
웨인 다이어 지음, 이한이 옮김 / 더퀘스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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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이기주의자>의 저자 웨인 다이어는 자신이 평생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자처하면서 깨달은 것을 조언의 형태로 <인생의 태도>에 담았다. 철저한 이기주의자에게 이타적인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어쩌면 세상이 기대하는 이타주의는 적극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이라기보다 덜 이기적인 사람과 태도를 지칭하는 말일 수 있다. 나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가려고 애썼다. 굳이 기독교인의 입장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애쓰지 않으면 그동안 익숙했던 대로 읽히게 된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한다. 기독교가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바가 그러하다. 복잡한 신학적 논쟁은 차치하고 인간은 본래적인 죄인이요, 이기적이고, 교만하다. 히틀러 같은 희대의 전범을 예로 끌어오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한 번이라도 면밀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교만한 상태에 있는 지 알 수 있다. 부인한다면, 설득시킬 수는 없다. 애초에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성이 죄의 본성이라서. 여튼 내 관점은 그러하다. 이기적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 정도의 이기심은 가지고 있을 것인데 웨인 다이어가 말하는 것처럼 이기주의자로 살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저자의 조언은 큰 틀에서 한 마디로 압축된다. 인생은 생각한 대로. 인생은 생각한 대로 이뤄지며, 내 선택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세계인만큼 자신의 책임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렸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도전하지 못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외부의 환경과 조건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 환경과 조건을 대하는 내 태도, 내 생각은 통제가 가능하다. 이런 조언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대개 하게 된다. 남 탓, 상황 탓, 부모 탓 등등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을 돌리면서, 피해는 자기가 받는다. ‘탓이 무엇인가? ‘책임이다. 저자의 말은 인생은 자기 선택의 결과, ‘책임을 지는 것인데, 그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고서 피해는 본인이 고스란히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피해를 받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 피해는 남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자기의 생각을 통제하지 못한 결과 느끼게 되는 패배감이기 때문이다. 고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태도이다. 저자가 말하는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그런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이기심을 어디에 적용할 것인가, 철저하게 자기에게 이기적 태도를 가질 것,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상황을 대하고, '생각한 대로' 상황을 바꾸어 갈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을 갖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태도를 나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한 예라고 할 수 있을까.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반인륜적인 방식을 선택할 것이 아닌 한, 어떤 이기적인 존재를 나의 이기심 아래 굴복시키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다 가능한 곳을 공략하는 것이 지혜일지 모르겠다.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남을 통제하려는 이기적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생각(감정)을 적극적으로 통제한다면, 아마도 그것이 남을 위한 이타주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나를 돌아볼 기회를 가진 일은 유익한 경험이었다. 물론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로 저자의 조언이 다 그럴듯 하게 들린다거나, 불편함이 없지 않다. 진정 인생의 의미를 물을 용기도 잃어버린 사람에게 태도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한 대로되지 않아서 이미 인생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과연, 생각을 바꿔보라는 조언이 힘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비관적으로 흐르는 감정을 잠시 붙들어 놓고, 어디서부터 잘 못되었는 지를 자신 안에서 찾아보는 일은 도움이 될만 하다.

 

요약하면, 웨인 다이어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고, 바꿔보세요. 그러면 달라질거예요." 라고 말하고, 우리는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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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평전
톰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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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바울평전서평, (비아토르, 2020)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한 성경. 인류가 성경을 목숨처럼 지켜내고, 읽었던 이유는 단순히 성경을 읽음으로써 개인의 삶이 윤택해지거나, 좀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게 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성경은 텍스트 그 자체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통해 인간의 생과 사를 규명한다. 그리고 성경의 권고를 받아들임(믿음)으로써 변혁의 은혜를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책이라 할 수 있다. 신자가 누리는 은혜는 개인의 삶뿐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키는 동력이 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데,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이라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잊지 않을 것은 교회의 신앙고백에 따라 성경이 성령의 영감된 글이라 할지라도, 인간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문서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냄에 있어, 성경 저자를 이해하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 간단하지 않지만 헛되지도 않다. 저자를 이해하는 일은, 곧 저자를 둘러싼 배경을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이 작업은 본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무엇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바울평전>은 탁월한 역사가이자 신약학자, 그리고 바울 전문가인 톰 라이트가 이미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성경, 곧 바울의 글로써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바울의 편지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그리고 편지들이 가리키는 진짜 무엇을 드러내려는 그만의 ‘Special Gift’인 셈이다. 우리는 <바울평전>을 통해서 바울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바울이 깨달은 바 메시야 예수의 복음이 열어젖힌 하나님 나라를 보다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작은 화폭에 바울을 그려냄으로써 드러내고 싶은 것은 바울 한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평전>은 바울 한 사람을 보다 큰 그림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광활한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다소의 어린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되기까지, 그리고 복음전도여행을 통해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들을 잇따라 맞닥뜨리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 무엇에 집중해 간다. 갖은 고난과 핍박, 숱한 의심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놓을 수 없었던 그 무엇’, 그리고 그 무엇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어떤 이유를 이 책 안에서 만날 수 있다.

 

  톰 라이트는 바울의 입체적인 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유대인과 로마인이 그리스 사상가이자 여행자인 바울 안에서 만난다(p. 323)”. 우리가 바울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실제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울의 글 자체라기보다 바울 한 사람을 구성하는 배경들이 워낙 복잡하게 얽힌 탓이다. 신자들이 성경읽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사는 현대와 성경의 주무대인 당대 사이에는 그 시간의 간격만큼이나 동떨어진 사회-문화-역사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을 이해할 수 없다면, 바울의 말은 더더욱 난해한 것이 된다. 이때 성경독자는 유혹을 느낀다. 간단하게 마무리하고 성경을 닫고 싶은 욕구말이다. 많은 사람들이(특히 목회자, 설교자) 그 간격을 단순히 교리적인 몇 마디로 메워버리려는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우를 범한다.

 

  만일 독자들 가운데 그런 게으른해석들이 바울이 전하고 싶었던 진짜메시지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면, 혹은 성령이 바울을 통해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에 조금이라도 동의가 된다면, <바울평전>은 바울이 진짜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조금이나마 가깝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도구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그동안 게으른해석에 자주 노출되었거나, 여전히 그런 해석이 마음에 드는 독자라면 톰 라이트의 바울 설명은 장황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전했던 진짜 무엇을 이해한 그 시대 사람들은 새로운공동체를 이루었고, 무엇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삶 전체를 갈아 넣었다. 그 결과 복음은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까지 닿아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하고 싶었던 진짜메시지를 궁금해하는 것은 짐짓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을까?

 

  <바울평전>은 한 사람을 소개함으로써, 그 한 사람과 시대를 바꿔놓은 메시야의 복음(죽음과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바울평전>과 함께 그 시대를 여행해보는 일은 생경하지만 흥분되는 도전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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