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아감벤의 책 중 읽어본 책은 <호모사케르> 한 권이다. 꽤 밀도가 높아 읽는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벌거벗음>은 <사케르>보다 쉽게 읽혔다. 그의 13번째 번역된 책인가? 아감벤의 다른 책들은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해 찾아보니 다른 책들도 얇다. 솔직히 얇아서 기뻤다. 시작하기에는 부담이 없는 외형이다. 그렇다고 한 마디로 쉽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의 책은 아니다. 아감벤에 대해 잘 모르기에 해석하기 쉽지 않고, 같은 용어도 경우에 따라 다르게 이해해야 하는 작가인지 몰랐다. 그 예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벌거벗음"은 그의 다른 책들에서 많이 나오는 개념인데, 이 책에서는 다른 책들과 조금 다른 의미로 쓰였다고 하더라. 벌거벗은 사진들을 가지고 이런 글은 아마 아감벤밖에 못 쓰지 않을까. 그는 "벌거벗음"을 (신학적 주술의) 베일을 벗겨내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아감벤의 글쓰기 형식 맘에 든다. <벌거벗음>은 10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고, 열 편의 글들은 다시 번호가 매겨진 글들로 구분된다. 1.~ 2.~처럼 번호로 나뉘어진 짧은 글들이 좋다. 아감벤만의 문체 형식인가 글쓰기 개성인가. 번호로 짤막하게 나뉘어진 글은 안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한달까. 뭔가 정리된 듯한 느낌이랄까.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인 세계로 나를 끌어들여 머리를 쥐어뜯도록 괴롭히는 게 아니라,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1번 2번 3번 이야.' 라고 꼭꼭 집어 얘기해주는 듯 하다. 하지만 (아감벤은 "철학자"니까~~) 책의 내용이 "1+1=2"처럼 명쾌하게 딱 떨어지지는 않는다.  음 그의 글은 생각하게 한다. "난 그가 미웠다."같은 문장처럼 읽는 순간 이해되는 글만 있는 것은 아니고, "구원은 창조에 앞선다."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게 무슨 뜻이지?"하며 그의 글을 계속 읽어나가게 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글들도 있다는 거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더 넓은 부분까지 보게 한달까. 

 

신학적인 개념들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흥미롭다. (1.창조와 구원) "세계를 구원하는 것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가지는 힘이다" "예술과 시, 비평과 철학은~통합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 신과 인간의 실천적 행위 두 작업으로 분리되어 있다." (7.벌거벗음)"완전한 벌거벗음은 지옥의 저주받은 육체에만 존재한다." "벌거벗은 신체를 본다는 건 모든 비밀 너머, 객관적 속성 이전이나 그 너머에 있는 순수한 지식-인식 가능성을 깨닫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후 혹은 부활한 육체에서 이미 목적을 이루었기에 쓸모없어진 "무위"개념을 끌어내는 것은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란 생각을 하게 했다. 신을 믿든 안 믿든, 심판 종말까지는 생각해 보았지만 종말 후의 세상이나 최후의 심판 다음날 아침을 맞은 인간들을 상상해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정치에 관한 책을 꽤 썼다. 현실과 변혁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일까. <세속화 예찬>이나 <목적없는 수단>의 경우 부제가 "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일 정도다. <벌거벗음>에서도 정치와 연관시킬 수 있는 내용들이 꽤 있다. 그의 사상이 뚜렷한 실천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 눈에는 그의 책들이 현실에 대한 "저항"을 하기 위한 새로운 사유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감벤은 "기 드보르"를 좋아해서 그에게 책을 바치기도 했고, "드보르의 책들은 저항 혹은 엑소더스를 위한 매뉴얼이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난 아감벤의 이 문장을 다시 아감벤의 책에 돌려주고 싶다. 아감벤의 책은 현실에 대한 '저항을 위한 매뉴얼"로 쓰면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어떤 면이 그렇냐고? 다 글로 쓸 순 없고, 말로는 더더욱 안 되니 ㅠㅠ 각자 읽어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간단하게 <<벌거벗음>>에서 보자면. (5.할 수 없음) 인간을 잠재성(가능성)으로부터 분리해 무능력하게 만드는 권력과 "할 수 없는 자유를 빼앗는 자본주의"와 "하지 않을 자유를 빼앗긴 인간"에 대한 글, (6.페르소나 없는 정체성) 개성이나 인격이 사라지고 단지 번호로 이루어진 "새로운 정체성"이 떠도는 세상에서, 나를 잘 알고 늘 곁에 있는 거대기계 뒤에 "나를 조종 기소하려는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란 글에선 인터넷 세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8.영광스러운 몸) 신의 뜻을 이루었기에 이미 목적을 달성한 부활한 육체의 -"원래의 활동에서 분리된 생식,소화기관 "에서 새로운 육체의 사용가능성을 탐구하는 부분 등. (9.황소의 굶주림 : 안식일,축제일,무위) "정지 요소를 포함하며 사람들의 일을 무화시키는" 안식일과 축제 개념을 통해 그는 일종의 저항, 탈출, 해방 등을 꿈꾸는 것 같다. 특히 (2.동시대인) "동시대인"이란 개념이 독특하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형 같다. (시대 장소를 막론하고 이런 존재는 항상 필요할지도) 동시대인이 되기가 쉽진 않아 보이지만. 부자나 CEO, 공무원 되고 싶은 아이들만 있는 세상 말고, 좀 고생스런 인생이겠지만 1% 정도는 "동시대인"이 되고 싶은 사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건 - 나는 될 자신도, 용기도 없기에 - 좀 이기적인 생각인걸까.       

 

동시대인? 그냥 우리 주변에서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만은 아니라는 거. 

 


"동시대적인 사람, 그의 시대에 진정 속해 있는 사람은 시대와 일치하지도,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점에서 비시대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 단절과 시대착오 때문에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의 시대를 더 잘 보고 파악할 수 있다.(23p)~
동시대인은 시대의 빛이 아니라 어둠을 인식하기 위해,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존재이다. 동시대성을 경험하는 자들에게 모든 시대는 어둡다. 동시대인은 정확이 이 어둠을 볼 줄 아는 사람이며, 그는 현재의 암흑에 펜을 적셔 글을 쓰는 사람이다.~어둠을 인식하는 일은 ~시대가 발하는 빛을 가로막고 시대의 어둠을 발견하는 능력이다.(27p)~
현재의 어둠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고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빛을 지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인은 드문 존재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29p)~
동시대인은 그의 자의성이 아니라 그가 응답해야 하는 긴급사태의 요청에 따라 역사를 `인용`할 수 있는 인물이다.(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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