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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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처음 들어본 작가라는 점, 죽음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인물의 얘기라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바로 전에 읽은 소설이 너무 난해해서 책장이 잘 안 넘어가 읽으면서 고통스러웠던 것과 달리 이 소설은 한 자리에서 다 읽었다. 책장이 잘 넘어간다. 예전에는 약간 비하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안다. 책장을 잘 넘어가게 쓰는 것도 한 능력, 재능이라는 거 말이다. 아무나 못하는 커다란 힘이라는 거. 혹자는 쉬운 소설을 쉽다고 무시할지 모르지만. 어찌 보면 소설 말고도 활자로 된 것의 기본조건은 독자가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축복>400페이지 정도 되지만 카페에 앉아 한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휘리릭 읽힌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 재밌다는 거다. 물론 소재적인 면이나 줄거리로 보면 흥미 있다, 재미있다란 말을 하기엔 조심스럽다.(암 말기 환자의 마지막 시간들에 대한 얘기니까)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엔 너무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듯하지만. 점점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짤막한 39개의 챕터들. 문체는 각 장의 길이만큼이나 간결하다. 이런 형식을 정말 좋아한다. 문체 때문인가 작가의 영혼이 맑아서인가. 소설을 읽다보면 투명한 느낌마저 든다.

 

노작가가 써서인가 삶을 관조하는 차분한 시선이 느껴진다. 뭔가 감정이 절절하게 표현되거나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게 쓴 것도 아니다.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 대드라는 인물이 죽기전 한 두달 얘기인데 아주 담담하다. 그의 마지막 시간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슬프거나 우울하진 않다. 읽고 나서도 감정이 정화되는 듯한 - 정리되는 듯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는다.(좋은 의미다.) 죽음이라는 소재에 대해서 썼지만 어둡지 않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인물이 곧 죽으리란 걸 알고 있어서인지 짧지 않은 소설을 읽어가며 대드의 아내와 딸과 함께 대드라는 인물의 죽음을 서서히 마음으로 준비해갈 수 있다. 죽음이라는 결론이 처음부터 나오지만 이상하게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죽음이 삶의 다는 아니기에. 우리모두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열심히 살아가기에 그런 거겠지. 소설에 등장하는 갑작스런 죽음이나 반전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너무 억지스런 죽음, 독자에게 충격만을 주기 위한 죽음은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죽음이 처음부터 예고되어서인지 차분하게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인물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책속으로 머리를 비집고 들어가서 거기로 가지마! 그 사람을 만나지마!”라고 말리거나 되돌리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소설도 있는 데 말이다. 어떻게 보면 과장되지 않고 담담해서 현실과 비슷한 느낌도 들지만, 막상 현실에서 죽음은 예고 없이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죽음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현실과는 달라서 <축복>이란 소설이 묘하게 안정감을 주는 지도 모르겠다. 대드의 죽음이라는 미래를 알기에 소설을 차분히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혹은 나 자신의 인생을 함께 되짚어보며 읽을 수 있어서 좋다고나 할까. <축복>을 통해 실제로는 죽음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면 한다는 혹은 죽기 바로 전 하곤 한다는,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거나 갈망하거나 용서를 빌고 싶은 여러 가지 경험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디션 프로 심사평에 나오는 "말하듯 노래하라, 공기반·소리반으로 노래하라"는 방법이 글쓰기에도 있다면 <축복>이란 소설이 그렇게 쓰여진 것 같다. 소설속 인물들의 감정이나 문체가 과장되거나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고 담담하다. 한 때는 독자를 죽음으로 유혹할 수 있을 정도록 강렬하고 열정적인 글을 꿈꿨지만, 이제는 <축복>같은 글을 쓰고 싶기도 하다. 전혀 멋부리지 않은 찬찬한 문장들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는 글을.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니까 대드의 삶에도 후회하는 아니 어긋난 것들이 있다. 아들 프랭크나 클레이턴의 일등. 왜 죽음이 다가오면 우리는 서로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바라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대드라는 인물이 가장 공감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부모님과 그의 생에 대한 얘기를 읽으면서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내가 여자여서인가 남자보다는 여자인물에게 시선이 더 갔다. 엄마를 잃은 앨리스라는 소녀, 11세 딸을 교통사고로 잃은 여자,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가 사랑의 상대를 잃은 여자. 여자들은 뭔가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다 상실한 사람들로 보이기도 한다. 남자 중에서는 라일 목사라는 인물이 기억에 남는다. 공격받을 걸 알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남자.

 

한 순간 원하는 걸 이루어 행복하지만 인간은 다음 순간 절망의 바닥으로 내리꽂히기도 한다. 이 책은 그게 인생의 단면이라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작은 시골 마을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내용을 흐뭇하게 읽다보면 확 찌르는 부분들이 나와서, 그런 부분을 읽을 때는 마치 달콤하고 부드러운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 아주 작고 쓴 맛이 나는 돌맹이가 콕 숨겨져 있는 듯 하달까. 미국 국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미국이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부분이 맘에 들었다.      

 

퇴근 후 카페에서 <축복>을 다 읽고 버스타고 집에 오는 중.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걷는데

문득 불어오는 바람. 1초의 순간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란 시구도 생각났다. <축복>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이 일상이 너무도 소중하고, 익숙해서 느끼지 못하는 "살아있음"의 상태도 소중하다는 걸 느끼게 해준 소설이라고 감히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나에게 <축복>은 잠간 하루의 한 순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바람"의 존재를 느끼게 해준 소설이다.

 

소중한 일상, "평범한 삶"의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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