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 그린 - 버지니아 울프 단편집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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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한나 아렌트는 제가 좋아하는 ‘정치적 글쓰기 3인방’입니다. ‘정치적 글쓰기에 버지니아 울프를?’하고 갸우뚱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요. 「3기니」를 읽어보신다면 이내 끄덕끄덕하게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울프의 문장은 오웰과 아렌트의 문장(또는 주장)에 비해 보송보송한 느낌이지만, 순간 번뜩이는 강렬한 빛에 눈이 뜨이면 한없이 붙들려 질문이 꼬리를 물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대표작인 에세이 「자기만의 방」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추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특히 소설은 한달음에 읽기가 정말 쉽지 않았거든요~ 작품과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조망해야 저자 특유의 섬세한 필치를 넘어 주제와 장면이 콜라주 되어 보이는데, 장편소설은 거기까지 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제가 힘든 걸 다른 이에게 추천하는 건 더 어렵고요.


하 지 만 !


이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단편소설집 「블루&그린」 덕분이에요. 총 18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으로, 저자의 집필 활동 기간(35년) 동안 쓰인 다양한 작품이 실려 있어 문체와 친해지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소설이 그 역사의 첫 발을 떼었을 때, 산문은 투박하고 서민적인 것이라며 환영받지 못했다고 해요~ 그런데 1900년대 초중반 시기에 쓰인 단편에서 울프의 문장은 시(운문)보다 서정적인 감수성으로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늘 그곳(자기 자리)에 있음에도 ‘존재’로 포착되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그윽하고 집요한 시선으로 언어를 부여한 단편들은 넋을 놓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었습니다. 존재함을 부여한 언어는 빛이요 생명, 그 자체였어요! 이런 천재를 만나면 글쓰기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니까요.


흔히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소개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는, 장면에서 장면으로 전이하며 명확한 끝맺음 없이 흐르는 사고의 이동을 담아냅니다. 독자는 ‘소설’에서 선명한 스토리를 기대하기 마련인데, 만날 수 없죠. 그게 특징인데 파악하기도 어렵고요. 그런데 단편은 압축적 분량을 무기로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울프의 장면 전이는,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떠올리면 한결 쉽게 다가옵니다. 인간의 눈이 포착한 빛의 순간을 그대로 화폭에 옮겨 담고자 했던 모네는 여러 개의 캔버스를 세워 두고 한자리에서 해가 이동하는 시간대에 따라 그림을 완성했다고 해요. 그렇게 연작으로 탄생한 수련, 건초더미, 루앙 대성당에 실린 붓놀림이 빛의 순간을 붙든 것처럼 울프는 펜놀림(문장)으로 눈에 보이는 장면(심상 포함)을 붙들어 보여줍니다.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 전개되려고 또는 끝내려고 이러지?’ 궁금해서 빨리 마지막 문단에 닿고 싶어 조바심이 났습니다. 저처럼 당장 누군가와 이 궁금증을 풀고 싶다 싶은 분들은, 부록으로 실린 해설을 적극 활용하시면 좋겠어요~ 저자에 대한 안내도, 한 작품씩 풀어놓은 감상도 역대급 친절해서 작품을 함께 산책하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거든요.


표제작이자 제목인 ‘블루&그린’의 이미지가 등장하거나, 빛깔이 서로 전이되는 장면을 채집하시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⅔ 지점에서 발견하고, 도돌이표 찍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샅샅이 읽으며 분홍색 인덱스로 연신 표시했는데요(숨은 그림, 틀린 그림 찾는 것 좋아함). 이렇게 장면을 연상하며 읽으니 독서 시간이 한결 풍성했습니다. 좋은 건 같이 해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같은 장편소설을 읽고 싶은데 엄두가 나지 않았던 분들이나, 저처럼 문체가 어렵게 느껴지셨던 분들은 단편소설로 먼저 친해진 다음 도전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본 서평은 필자가 읽고 싶은 책의 서평단에 직접 지원하여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도서제공 #더퀘스트 #길벗출판사 #읽고싶어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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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반쪽사 - 과학은 어떻게 패권을 움직이고 불편한 역사를 만들었는가
제임스 포스켓 지음, 김아림 옮김 / 블랙피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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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 단짝 참고서(또는 필독서)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2022년 출간되어 최근 번역된 제임스 포스켓의 <과학의 반쪽사(Horizons)>입니다. 그동안 유럽에만 집중했던 시각을 전 세계로 펼쳐 정리한 근현대 과학의 세계사라고 보시면 되어요~


15세기 과학 혁명의 시작부터 21세기까지의 흐름을 총 4부로 나눠 소개하고 있는데요. 유럽의 유명 과학자에 밀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 곳곳의 과학자의 발견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기존에 잘못 해석되어왔던 정보를 교정하여 과학사의 큰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과학과 역사의 근현대 흐름을 단 한 권으로 섭렵할 수 있는 책이에요!


개인적으로 19-20세기 세계문학 고전을 좋아하는 저는, 한 챕터를 클리어할 때마다 개안(開眼)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책, 과학사나 세계사에 관심 많은 분들뿐만 아니라, 세계문학 좋아하는(또는 시작하는) 분들께도 추천하고 싶어요~


읽으면서 관련 검색어로 떠오르는 세계문학 제목을 여백에 적어 인덱스 스티커를 붙이느라 여념이 없었거든요~ 그동안 배경 이해에 필요한 정보를 찾을 때 부족했던 여러 국가의 실상이 다뤄져 있었기에 단비 같은 발견이 쏟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15세기 천문학사를 소개한 1부만 보아도 이슬람에서는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을, 서아프리카에서는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멕시코에서는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떠올리며 비밀을 풀어볼 수 있었습니다.


‘과학사라니… 과알못은 웁니다💦’ 싶은 분들께도 자신있게 권할 수 있어요! 과학지식이 부족한 저도 눈높이를 맞춘 저자의 설명 덕분에 편안하게 읽었거든요~ 수채화를 덧칠해 나가듯 부드럽게 정보의 층위를 쌓아가며 이해를 돕는 방식이었는데요. 각 챕터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럽 과학자(또는 인물. 예를 들어, 콜럼버스, 뉴턴, 다윈 등)의 스토리로 흥미를 깨우고, 지리를 이동해 같은 시기에 아메리카, 중국, 인도 등지에서는 어떤 발견이 이뤄지고 있었나 섬세하게 비교해 줍니다.


저자의 집필 의도를 다섯 쪽마다 듣게 되는 책으로는 1등 할 것 같습니다. ‘과연 그게 다일까요? 잠시 여기 좀 보시겠어요?’ 식으로 부드럽게 각국의 독자적인 발견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계되었으며, 어떤 고리가 끊어졌기에 우리가 모르고 있었는지,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부서지고 잊혀 갔는지 담담하게 풀어냅니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닌데, 세계사를 읽을 때보다는 덜 쓰린 정도였어요~ 저자가 소개하는 한 사람(또는 과학자)의 탐구 열정을 쫓아가다 보면, 어느새 역사의 이면이 읽히고 어떻게 과학이 발전되고 연결되어 있는지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저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영국) 확인하게 만든 표현(또는 관점)의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반박 포인트에 적절하게 등장해 주석을 달아 준 역자 김아림 님의 섬세한 배려 덕분에, 분노보다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며 읽어나갈 수 있었어요~ 번역가와 함께 읽는 느낌이라 혼자서도 대화하듯 여백에 질문을 빼곡히 채우며 읽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Horizons : The Global Origins of Modern Science’인데요, 근현대에 초점을 맞췄다는 직관적 이해는 포기해도 기획 의도를 탁월하게 반영한 <과학의 반쪽사>라는 제목에 감탄했습니다. 시선의 균형을 맞춘 점이 좋아서 ‘과학의 양쪽사’까지 욕심내어도 될 것 같아요!


서평은 객관적 글쓰기로 채우고 싶었는데, 이 책은 예외입니다. 조카가 고등학교 진학할 때까지, 정보 수정과 첨언 필요한 자료를 덧붙여 단권화해서 선물할 거예요. 정보뿐만 아니라, 저자의 열정과 역자의 정성, 그리고 세대를 아울러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균형 있는 세계관을 깨우는 기획 의도까지! 의미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어 감사한 독서 시간이었습니다.


📔 <과학의 반쪽사> 제임스 포스켓


#도서제공 #블랙피쉬 #과학의반쪽사 #plantyou

#과학 #역사 #과학사 #반쪽 #패권전쟁 #타임즈추천도서 #네이처추천도서 #해외언론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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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 뇌과학이 밝힌 인간 자아의 8가지 그림자
아닐 아난타스와미 지음, 변지영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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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시작된 건, 아홉 살이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일기를 검사받던 시절이었는데 숙제로 제출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어 두 권의 일기장이 필요한 아이였거든요. ‘자아’에 대한 호기심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하고, 보다 전문적인 지식까지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심리학, 신경과학, 정신의학, 철학, 그리고 때로는 문학을 넘나들며 ‘자아’라는 궁금증을 풀어줄 뇌과학서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아가 있다, 없다 하는 논쟁의 중심에 이 ‘나’가 놓여 있다. 주체로서의 자아, 아는 자로서의 자아, 주체성이라는 경험을 만드는 자아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아는 있는가 없는가?❜ 359p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2016년 발표된 저서로, 국내 번역 초판본인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남자 : 자아의 8가지 그림자(2017)>의 개정판입니다. 원제는 <The man who wasn’t there>로 내용이 다른 동명의 영화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로 번역된 전례로 볼 때, 초판본 제목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스테디셀러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맞췄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주인공들의 사례를 보면, ‘나를 잃어버린’으로 함축해 표현한 개정판 제목은 탁월한 선택입니다. 자신을 ‘죽었다, 없다, 사라졌다’라고 느끼는 인물 간의 공통점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풀어가는 서사가 적절히 어우러지기 때문입니다.


❛연구 결과들은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지,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느 하나를 원인으로, 다른 하나를 결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122p


저자 아닐 아난타스와미는 과학기술 주간지 《뉴사이언티스트》의 전 부편집장이자 현 고문인 저널리스트로, 영국 물리학회와 과학저술가연합에서 수여하는 물리학저널리즘상과 최우수탐사저널리즘상을 수상한 칼럼니스트입니다.


서술은 깔끔하지만, 띠지에 소개된 문구(“올리버 색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도 푹 빠질 것이다”)를 보고 저자의 시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스함을 기대하셨다면 조금 내려놓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올리버 색스의 서술(<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대표로)이 독자에게 매력적인 것은 의학적 관점을 넘어 존재를 마주하는 따스한 시선(문체에 배어 나오는 온기)에 있을 테니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감상입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적 상호작용뿐이다. 자폐증을 가진 사람들은 변화된 자아를 경험하고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을 힘들어한다. 하지만 신경전형인도 자폐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소통이란 그 정의대로 쌍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때때로 어쩌면 다른 정신세계 사이에서 일어난다 하더라도.❜ 275p


그러나 뇌과학적 관점에서 이뤄진 유의미한 발견을 이어본다면, 짜릿한 즐거움을 안겨줄 만남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출간된 1980년대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신경과학적 원인들이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출간된 2010년대에는 어디까지 연결되는지 견주어 볼 수 있거든요!


35년여의 시간을 건너 열린 비밀의 문이 독자를 끌어당깁니다. 예를 들어,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알츠하이머병(자기 이야기를 잊은 사람)을 다룬 2장과 신체감각부조화(한쪽 다리를 자르고 싶은 남자) 3장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길 잃은 뱃사람,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 이야기와 함께 보시면 더욱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나’와 ‘나의 것’의 경험을 뒷받침하는 자아를 찾으려 한다면, 아마도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영속적인 자아라는 허구의 개념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이 책의 여정을 시작했던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 나는 누구인가?❜ 351p


하지만 이 책에서 독자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저자의 의도 또한 그에 부합하지 않고요. 다만 ‘나’와 ‘자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사고의 재료를 풍성하게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나치게 학술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은 담백한 서술로 자아를 탐구할 퍼즐 조각을 한 아름 안겨주는 책,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서제공 #길벗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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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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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의 글은 감상 한 편에 마음을 사로잡혀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필력에 감탄하고 사유의 결에 반한 티가 역력한 감상이었지요. 오늘 소개할 책은 지난 1월 말 출간된 비비언 고닉의 신간 <짝 없는 여자와 도시>입니다.

❛도시의 군중에 관해 쓴 19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 둘은 찰스 디킨스와 빅토르 위고였다. 두 사람은 급속히 발달되어가던 대도시 런던과 파리에서 군중의 의미를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일찍이 파악한 작가들이었다. (…) 나는 군중의 영속성을 떠올린다. 뉴욕은 나의 도시인 만큼이나 그들의 도시이지만 어느 누구도 이 도시를 더 가지진 못한다.❜ 108p

국내 번역서로는 세 번째, 비비언 고닉 선집으로는 두 번째인 이 작품은 2015년 발표된 에세이집입니다. 전작 <사나운 애착(1987)> 이후 무려 30여 년의 시간을 달려 독자에게 닿은 글인데요. 도시를 기점으로 교차하는 만남과 단상이 시공간의 성격을 변모시키는 방식이 놀랍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의 숲에서 시적인 언어로 사색했다면, 비비언 고닉은 뉴욕의 도시 한복판에서 산문적인 언어로 사색했다고나 할까요?

저자 비비언 고닉은 1970년대 여성운동을 취재하며 《빌리지보이스》의 전설적 기자로 이름을 알린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입니다.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는 그의 이력은 더 읊지 않아도 이후 인용할 문장에서 충분히 설명될 것입니다.

잘 쓴 에세이의 매력은 글쓴이의 사색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흡수할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를 남용하면 어설프게 훈수 두기 바쁜 자기개발서에 그치겠지만, 탁월한 에세이스트라면 그렇지 않겠지요. 비비언 고닉의 글은 완급 조절에 있어 독자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삶을 느끼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살아낸 방식일 수밖에 없다. / 뉴욕의 우정은 울적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 자기표현이 풍부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 분투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는 누군가의 징역에서 벗어나 또 다른 누군가의 약속으로 탈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44p

브롱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 글을 쓸 때도 뉴욕에 살고 있는 저자의 눈에 비친 도시는 천태만상의 풍경으로 이야깃 거리를 제공합니다. 첫사랑의 알싸한 기억을 담은 애러비(저자에게는 맨해튼)가 되었다가, 상실의 아픔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음을 널어 놓는 공간이었다가, 작은 호의에 덤덤한 감사로 흡족하기도 하고, ‘정다운 무관심’에 오히려 위로받기도 하는……. 그런 곳이죠.

도시가 사색의 공간이 된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떠내려가는 무채색의 공간이, 저자의 표현 하나하나에 색채를 부여받아 표정을 얻고 생명력을 뿜어내며 말을 걸어옵니다. 반드시 ‘도시’가 아니라더라도, 그곳이 ‘뉴욕’이 아니더라도, 오늘 처음 본 것처럼 낯설고 새롭게 보면서 사색의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있다면 어디든 고닉의 뉴욕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상화된 타자로 인해 외롭지만, 쓸모 있는 고독 속에 스스로를 상상의 동반자 삼아 침묵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각 있는 존재라는 증거를 방 안 가득 채워 넣는 ‘내’가 있다. 이런 통찰의 기틀을 마련하는 법은 에드먼드 고스로부터 배웠다.❜ 184p

독서를 즐겁게 하는 두 번째 요소는 다양한 문학적 비유가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제목부터 그러한데요, 이 책의 원제 <The Odd Woman and the City>는 조지 기싱의 소설 <짝 없는 여자들(The Odd Woman)>에서 차용한 표현입니다. 책의 후반부에 저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한 글이 있습니다만, 이 제목의 의미를 다양하게 조명해 보는 것도 독자의 즐거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자가 담아낸 뉴욕의 표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Woman’이 ‘Human’의 함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조지 기싱의 소설은 또 어떤 의미를 감추고 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 될 거예요. 원작을 읽고 견주어 보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더없이 유익한 만남이 되겠지요.

❛앨리스는 여든다섯을 훌쩍 넘긴 나이로 진통제에 의존해 지내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 진 빠진 모습은 대체로 육체보다는 정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 고도의 지성이 작동하자, 반송장 같던 사람이 생생한 활기를 되찾는 모습을 본다는 건 그야말로 마법이나 다름없는 변신을 목격하는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115p

독자를 붙드는 세 번째 요소는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에 대한 사색입니다. 저자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레너드’와 ‘어머니’ 외에도, 다양한 뉴욕의 친구들이 소개되는데요. 인상적인 만남을 갈피하는 것도 독서의 묘미입니다. 특히, 눈물이 찔끔 날 뻔할 때쯤 툭! 잘라버리는 저자 특유의 덤덤한 문체도 자꾸 보면 감동이고 매력이에요.

그중 필자의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만남이 바로 ‘앨리스’입니다. 노인 요양 시설에 들어간 이후, 지적인 대화의 부재로 사유의 수혈이 끊긴 채 시들어 있는 그를 보며 느꼈던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전해져와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의 소중함을 새삼 실감하는 장면이었어요.

❛우리는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 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216p

독자에게는 비비언 고닉의 글이 고도의 지성을 작동시킬 대화 상대가 되어줍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소음보다 소통이 필요한 ‘짝 없는 사람들(The Odd Humans)’일지 모르니까요. 독자의 사색에 숨을 불어넣는 책, <짝 없는 여자와 도시>였습니다.

#도서제공 #문학동네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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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게리 - 건축을 넘어서 현대 예술의 거장
폴 골드버거 지음, 강경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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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 랭 크 게 리

기사에서 우연히 보게 된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은 특유의 움직임으로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땅에 붙박혀 고정된 건축물이 금방이라도 펄럭일 것 같은 동적 곡선을 가졌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흡사 스페인의 가우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이 건축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무척 궁금했어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마주한 가우디Antoni Gaudi의 작품은 게리에게 또 다른 큰 영향을 미쳤고, USC가 강조했던 것만큼 직선이 중요하지는 않다는 믿음이 한층 굳어졌다.❜ 203p

오늘 소개할 책은 지난 2019년 10월, 서울 청담동에 오픈한 ‘루이비통 메종 서울’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전기 <프랭크 게리 : 건축을 넘어서>입니다. 2015년 발표된 책으로, 건축 비평가 폴 골드버거가 쓴 최초의 전기이자 국내에 번역된 그의 두 번째 저서입니다.

저자 폴 골드버거는 <뉴욕 타임스>에서 시작해 15년간 <뉴요커>에서 활동한 기자로, 퓰리처상과 빈센트 스컬리 건축 비평상을 받은 건축 비평가입니다. 건축 비평이 본업인 그가 누군가의 전기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 대상이 ‘프랭크 게리’라는 점은 독자에게 놀라운 경험을 선물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독자에게 ‘전기(傳記)’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인물의 생애를 따라가며 그가 살았던 시대 배경지식을 섭렵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삶(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인물의 대응 방식을 통해 인생을 대하는 관점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나는 내 경력의 아주 이른 시점부터 게리의 초기작부터 쭉 그의 작업을 기록해왔다.❜ 13p

건축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프랭크 게리의 초기 작업부터 보아왔던 저자는 일반 전기 작가가 보여주었을 서술과 다른 특별함을 담아냅니다. 게리의 유년기인 1930년대 미국의 모습부터 최근의 모습까지, 당대의 사건보다 도시 계획이나 건축 구조물을 비중 있게 묘사하며 독자로 하여금 도시 곳곳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몇 가지 건물은 따로 검색해 봐야 하지만, 함께 수록된 사진 자료를 통해 보다 입체적인 모습을 상상하며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책의 매력입니다. 한국은 게리의 최신 작품을 실물로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환경을 재설계하려면 우리는 가치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당연시되는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292p

사실 책의 ⅔ 지점인 50대에 이르기까지 게리는 성공보다 실패를 자주 경험합니다. 이뤄지지 않은 프로젝트, 50-60개의 모형을 만들었지만 허사가 된 계획, 실행되지 않은 아이디어들, 순탄하지만은 않은 가정사, 클라이언트나 동업자와 관계가 틀어지는 일도 허다하죠. 하지만 기존 환경과 어우러지면서도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자신만의 형태를 창조하고 싶어 한 그의 신념과 집념은 서서히 결실을 맺어갑니다.

저자 폴 골드버거는 현존하는 최고의 건축가 중 한 사람의 일생을 재현하면서도, 그의 일상 곳곳을 비춰 서술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합니다.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면이나, 두려움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연결되어 있던 사업을 하루아침에 접은 사건(이지 에지 가구 관련) 등 놓치지 않고 포착합니다.

❛건축물은 우리에게 비를 피할 곳을 제공할 책임이 있지만, 그러한 기능이 전부라면 별 볼 일 없다고 게리는 믿었다. 건축물이 비를 피할 장소를 제공해 주는 동시에 감정까지 불러일으킨다면, 그제야 어떤 고지를 달성하게 된다.❜ 813p

프랭크 게리는 서로 어울리거나 결합하지 못할 것 같은 두 가지 속성을 조화시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건축, 비움과 채움이 공존하는 공간, 예술과 실용의 컬래버레이션, 미완성이기에 주변 환경과 어우러질 때 완성품인 구조물, 정적인 사물에 생물의 동적인 속성을 불어넣는 디자인, 추하다고 숨겼던 재료를 밖으로 끌어내 본연의 멋으로 재해석한 시선.

언제나 환영받는 시도는 아니었지만, 결국 자신의 방식으로 대중을 설득해가며 어우러져 가는 방법을 익혔던 건축가 프랭크 게리. 20세기 미국의 건축물 변천사와 그의 삶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 책, <프랭크 게리>였습니다.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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