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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10.2.16.
by 나스메 소세키(2003, 민음사, 윤상인 역)
" 은방울꽃, 백합, 비에 젖은 향기들 "
나스메 소세키를 처음 접한다.
아름다운 책이다. 은은한 꽃 향기와 촉촉한 비로 감싸인 심상.
정말 손에서 놓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근대 소설이다.
우리나라의 이광수 같은 작가...
그러나 지금 읽어도 삶의 본질을 꿰뚷는 작가의 생각이 돋보인다.
다이스케, 히라오카, 미치요의 삼각 사랑을 기본 구도로 하고 있으나
불륜이나 연애 소설이라 말할 수 없다.
다이스케의 독백, 생각의 흐름을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풀어 간다.
다이스케는 부유한 사업가의 막내 아들로 나이 서른까지도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아버지의 경제력에 기대어 산다.
의미가 없는 노동,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노동을 경멸한다
그러나 미치요를 다시 만남으로써 거대한 사랑의 힘에 의해 움직이게 되고
소설의 끝에는 취업을 위해 거리로 뛰어 든다.
미치요에 대한 사랑을 '자연'이라 표현한다.
미치요와 이별해 있던 3년 동안 멀리했던 강렬한 백합의 향기를
다시 들여 놓고 비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영상은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하기가 힘들다.
이 책을 책꽂이에 꽂아 놓으면 은은한 향기로 가득할 것 같다.
나스메 소세키의 다른 책도 같이 꽂아 놓아야겠다.
in book
개미가 방으로 기어드는 계절이 되었다. 다이스케는 커다란 수반에 물을 붓고 그 안에 새하얀 은방울꽃을 줄기째 담갔다.
떼 지어 핀 작은 꽃들이 짙은 무늬가 있는 수반 가장자리를 뒤덮었다. 수반을 움직이면 꽃이 넘실거렸다.
다이스케는 그것을 큰 사전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그 옆에 베개를 놓고 벌렁 누웠다.
검은 머리가 수반의 그림자에 포개지니 꽃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가 기분 좋게 코에 스몄다. 다이스케는 그 향기를 맡으면서 선잠을 잤다.
좀 전에 미치요가 들고 들어 온 백합이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감미롭고 강렬한 향기가 두 사람 사이에 서려 있었다.
다이스케는 코 끝에 와 닿는 숨 막힐 만큼 강렬한 자극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함부로 치워버릴 정도로 미치요에 대해 거침없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 p171
비는 점점 세차게 내렸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빗소리가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가도노가 나오더니, 약간 추운 것 같으니 유리문을 닫을까요 하고 물었다. 유리문을 잡아당기는 사이에 두 사람은 똑같이 뜰 쪽을 보고 있었다.
푸른 나뭇잎들이 전부 흠뻑 젖었고 온화한 습기가 유리창 너머로 다이스케의 머리를 적셨다.
세상에 떠 있는 것은 남김없이 대지 위에 내려앉는 듯이 보였다. 다이스케는 오랜만에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비로소 자연의 옛 시절로 돌아가는구나...'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안위를 온 몸에 느꼈다.
왜 좀 더 일직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왜 자연에 저항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는 비 속에서, 백합 속에서, 그리고 재현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완벽하게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은 어디에도 욕망이 없고 이해관계를 따지려 들지도 않았으며 자기를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 p276
그는 신경이 예민해진 나머지 어떤 미신에 빠져 들었다. 미치요가 위험하다고 상상했다. 미치요가 지금 무척 괴로워하고 있다는 상상도 했다.
또한 미치요가 지금 빈사지경에 있다는 상상도 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해서 죽지도 못하고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상상도 해 보았다. 다이스케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부서질 정도록 히라오카의 집 문을 두드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은 히라오카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손가락 하나 댈 권리가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이스케는 무서워진 나머지 뛰기 시작했다. 조용한 골목 안에 자신의 발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다이스케는 뛰면서도 여전히 무서웠다. 걸음을 늦추었을 때는 너무 숨이 차서 괴로웠다. - p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