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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ㅣ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평점 :
<초정리 편지>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와 이 책까지 3권의 책의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다. 배움이 넘쳐 흘러 식상해 버리다 못해 짐짝이 되어 버린 이 시대에 이런 가르침이 통하기라도 할까 잠깐 회의가 들다가도 진짜 배움이 뭔지 모르고 헤매고 있는 아이들이 아하 진짜 배움은 이런 즐거움을 주는구나 하고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요즘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가 폭발적 인기를 끄는 이유 비슷할까. 매체가 너무나 많아지고 아무나 음반을 만들고 아무나 연주하고 노래해서 인터넷에 띄우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철저히 상업적인 음악으로서 아이돌 그룹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진짜 가수들이 나와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진정성을 보는 프로를 보며 가수는 이런 거야 하고 깨닫는 청중들은 진짜 가수를 느끼고 있다. 진짜를 느끼는 즐거움은 진짜 크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 看書痴 라는 말은 인천 송도의 한 여자 고등학교의 도서관 이름으로 정해졌다. 책만 보는 바보란 그냥 책만 보고 빈둥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언뜻 그렇게 들리기 하지만 간서치는 진정으로 배우고 배움을 몸소 실천하는 즉 앎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이 책에서는 책만 보는 바보라 불리는 조선 후기의 인물 이 덕무를 둘러싼 친구들와 스승이 소설적으로 묘사되고 이 친구와 벗을 통해 배움의 과정도 진솔하게 서술된다. 이 배움을 실천한 이 덕무가 왕궁의 규장각에 들어가고 그 후 마을 관리가 되어 치리하는 과정은 삶과 앎의 일치를 보여준다.
이 덕무는 서자로 태어났다. 간서치 할 때 치는 바보란 뜻인데 아마도 벼슬길에 나갈 길이 없는 서자가 책만 보고 있으니 바보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이 덕무는 농사나 다른 일을 해서 살 궁리를 하지 않고 오로지 책을 읽고 배운다. 그를 괴롭히는 가난, 추위, 근심, 기침 이 네 가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하는 일은 진짜로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자는 양반 계급의 특권층 남성이 성의 노리개로서의 여성과 정욕을 만족시킨 후 만들어진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인정받지 못하고 벼슬도 할 수 없는 현실의 답답함 속에서도 묵묵히 책을 보았다는 사실에서 크리스쳔의 생활을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고 그의 의를 구하는 구도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는 삶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로 머리를 채우지 않는다. 이 덕무처럼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 애쓰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이 덕무는 자신의 호를 청장 靑荘 푸른 백로라고 정한다. 눈 앞에 지나가는 고기를 필요한 만큼만 먹고 사는 욕심 없는 새라고 한다. 그 푸른 백로의 성품을 닮아 서자 제도를 타파하려는 혁명을 꿈꾸는 것도 아니며 부를 축적해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책읽기는 종교적이고 영적이기까지 하다.
이 덕무의 딱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 속에는 정금 같은 친구와 진주 같은 스승이 포진하고 있다. 친구들 중에는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과 같이 학문으로 맺어진 친구가 있다. 이들은 후에 한문학사의 네 대가로 역사에 남는다. 이 친구들의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다. 친구를 바라보는 존경심은 나이를 초월한다. 또한 서로 배운 바를 이야기 하고 서로의 학문적 성숙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고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를 걱정해 준다. 사실 요즘 국어에서 ‘친구’는 동갑인 사람 중에 친한 사람으로 그 뜻이 좁아 졌고 또 그 의미가 많이 오염되었다. 친구라는 말은 “내가 니 친구냐? “(너 예의가 없구나라는 뜻), “우리 친구들이 정말 잘했어요!”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가리킬 때 쓰는 친구), “그 친구 맘에 안 들어” (사람의 대명사로서 친구) 등의 말에서 쓰임이 달라지고 있다. 그러니 주인공의 친구들에게는 친구라는 말보다 ‘벗’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이메일이 없던 학창시절 편지지에 펜으로 꼭꼮 눌러 편지를 쓰고 마무리 할 때 항상 너의 벗 아무개라고 쓰던 시절이 있었다. 이 아련한 벗이란 말이 이 책에 등장할 때마다 우리 삶에서 벗들의 사귐은 이 덕무의 벗을 닮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친구와 더불어 이 덕무이 스승은 연암 박 지원과 담헌 홍대용이 있다. 친구가 더 없는 위로를 주는 배움의 동반자였다면 스승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과 선입견을 버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학문의 자세를 가르쳐 준다. 지구가 둥글고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배우는 과정에서 스승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며 그 세계를 기쁘게 탐험하며 알아갈 때 진정한 스승 제자 관계가 성립함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이런 사고의 전환과 삶의 태도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았던가.
이 덕무와 그의 벗들은 열심히 학문을 닦고 스승을 만나 그들의 사상을 배워 드디어 중국으로 나아가 조선이 아닌 세상을 관찰한다. 드넓은 대륙에 발을 내딛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후 대궐로 들어간다.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들은 규장각 검서관이 되려는 스펙을 쌓은 것도 아니요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공부를 했을 뿐이다. 이런 공부 맛을 아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 점수를 위해 공부하도록 만들어진 학교 시스템이 한탄스러울 뿐인데, 그런 환경 속에서도 배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청소년이 이 책을 읽기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가져 본다.
사심 없이 공부하고 배운 바를 삶에 실천한 이 덕무의 삶은 이제 노년으로 접어 들어 기력이 쇠해간다. 그럼에도 이 덕무의 손자가 붓을 들어 하늘 천자를 쓰는 모습에서 대대 손손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손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책은 성공이나 스펙 쌓기 등에 늘 우선 순위를 빼앗긴 친구와의 우정과 스승의 가르침, 배움의 진정성에 대해 깊이 느끼고 사고할 만한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중간 고사 시험 공부하느라 정신 없는 아이에게 주말에 읽어 보라고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