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만나지 못한 말들 - 너무 늦게 깨달은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이림 지음 / 심플라이프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한줄 요약 : '있을 때 잘해'라는 충고의 과격하고 슬픈 변주.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덮었는지 모른다.

단지 서평단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누구나 부모는 보내야 하고 나도 보내봤기에 버틸 수 있다 생각했지만 어림없다며 문장으로 후려치는 통에 참 아팠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었을까?

단지 읽기만 하는 내가 이 정도로 힘든데 작가는 쓰면서 몇 번이나 파일을 종료하고 컴퓨터를 껐다가 켰을까?

그럼에도 책이 내 손안에 있다. 어떻게든 써냈다는 거고 어떻게든 살아 냈다는 거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 연민, 분노, 증오, 애정 등 공존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한데 섞어 어떻게든 이뤄 냈다. 살아내줘서, 써줘서 고마웠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고 1때 돌아가신 어머니, 남편과의 불화, 끝내는 이혼, 아버지와 다르게 살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도 알코올 의존... 기구한 삶의 연속보다 더 아픈 건 따로 있었다. 책에도 나온 표현이지만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공처럼 잡을 수 없는 아버지와 나의 인생. 그까짓 중력이 뭐라고 극복해 내지 못하는 나의 유약함이다. 

"딸"이라고 녹음된 어머니의 핸드폰, 신문사 편집 기사인 딸 이름을 찾으려 구독한 신문 뭉치로 대변되는 부모님의 물건이 있다. 작가는 물건을 매개로 애증의 부모와 소통하고 있다. 버리지 말았어야 했을 물건이었지만 어쨌든 버려냄으로써 또 한 번 살아낸다. 나 역시 작가를 응원하면서 동시에 나를 응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알코올 중독 유전자가 있다는, 그래서 술독에 빠진 아버지를 구하기는커녕 자신조차 빠져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톨스토이의 '불행한 가정은 그 이유가 다 다르다'라는 말과는 달리 술 때문에 무너져 가는 또 하나의 가정이 여기 있었다. 나도 비슷한 아버지가 있었기에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삶을 붙잡고 있다. 작가도 나처럼 지금 이 순간도 싸우고 있을 것이다. 함께 해줘서 고맙고 나도 작가와 함께 싸울것이다.

나는 출근해서 일하다 문득 지금쯤 아이들이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젠 세상에 없는 아빠를 생각한다. 

우리 아빠도 그랬을까? 이제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도 그랬어라고 하면 거짓말 아니냐고 몰아 붙이고 싶고 그렇지는 않았다고 하면 완전 나빴네 하고 핀잔을 주고 싶다. 상상 속에서라도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빠와 웃으며 대화해 본다. 

책을 읽으며 정말 많이 울었다. 작가의 말처럼 너무 보고 싶어서. 아빠는 이제 볼 수 없어서 보고 싶고, 엄마는 언제든 볼 수 있어서 보고 싶다. 나도 후회하겠지. 만날 수 없을 때 더 후회하겠지. 우리는 모두 후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괜찮아진다. 그래서 이 책에, 그리고 작가에게 감사하다. 

(무슨 말을 써놨는지 잘 정리가 안된다. 이런 혼란스런 서평의 흐름이 바로 '만날 수 없는 말들'의 속성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어렵사리 감상을 마무리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절
링 마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 열병이 전 세계를 덮친다. 확진자는 그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틴을 끝없이 반복하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중국 이민자인 캔디스 첸의 눈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급격하게 쇠락해가는 뉴욕, 그리고 세계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동일한 패턴의 소식을 통해 멸망해가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현재와 과거, 그리고 더 과거로 시점이 이동하는 형식으로 스토리가 펼쳐진다. 왜 캔디스가 콜로니에 합류했는지, 어쩌다 미국에 거주하게 됐는지 플래시백을 통해 꼼꼼하게 설명해 준다. 그렇다고 그 설명이 과하다기 보다 내용 전개를 풍성하게 해준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작가의 독자를 향한 치밀한 배려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단절이라는 간단 명료한 제목을 통해 작가가 무엇을 드러내려 했을까?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사람, 공동체, 국가 간을 단절시킨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작가는 단절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늘 회사 입구에서 날 반겨주던 살가운 관리담당자가 어느 날 없다면? 내 옆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을 치던 동료가 없다면? 회사 대표가 새로운 계약서를 내밀며 소수 정예로 TF 팀을 꾸린다고 한다면? 화사엔 작동하는지도 모를 CCTV와 나만 남았다면? 이 모든 것이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인데도 캔디스는 관성에 이끌려 계속 출근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추락의 위험성을 느꼈는데도, 911도 출동하지 못한다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30층을 넘는 계단을 매일 같이 걸어 올라가 출근한다.

 나라면 어땠을까? 극한의 상황이 소설 속에 펼쳐지고 있지만 큰 이질감은 느끼지 못했다. 나도 그렇게 계속 출근하지 않았을까? 집 밖은 위험하지만 회사만큼은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루틴이라는 게 정말 무섭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없던 루틴까지 만들어 기적을 낳아보겠다는 움직임이 많다, 운동, 독서 등 좋은 것이 습관화가 되면 더 이상 그것을 반복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유지할 수 있다는 이론도 있다.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SNS에 무수한 간증자들이 넘쳐난다. 이 소설에서는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의 루틴을 계속 반복한다.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인 식사, 수면, 목욕 등의 행위는 일절 하지 않고 소위 '일'이라고 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작가는 바로 여기서 현대인을 습격하고 있는 결핍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루틴 반복은 뭔가 하고 있다는 성취감으로 우릴 채워주는 것 같지만 그것이 예기치 않게 중단됐을 때 찾아오는 불안감으로 이전에 채웠던 뿌듯함을 상쇄시킬 수 있다. 그리고 루틴을 꾸준히 지켰지만 SNS의 간증자들과 같은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박탈감까지 떠안을 수도 있다. 이 얼마나 소모적인 비극인가.

 캔디스는 몇 명 남지 않은 회사에서 이와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찾아온 상황이라고 캔디스를 통해 말하고 있다. 어렵게 정착한 뉴욕이라는 세계의 중심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일을 향한 강력한 강박과 집착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도 모자라 일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킨다. 선 열병으로 인해 멸망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캔디스는 점차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 '달까지 가자' 등의 직장 소설은 솔직하고 디테일하게 일과 나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다. 표현과 배경의 결은 확연하게 대비되지만, 링 마의 소설에서도 '일'이라는 내 전부와도 같은 루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든다. 일이 나인지, 내가 일인지, 내가 나인지. 가장 위험한 단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나와 나의 단절이다.

  캔디스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당연히 원치 않았던 임신이었겠지만 무조건 낳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새로운 생명이 무사히 빛을 보았는지 결말에 표현되지는 않았다. 그 아기가 처음으로 볼 빛은 희망의 빛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 생명을 희망이라는 메타포로 활용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읽으면서 한없이 슬프고 무력해지다가 마지막에 잃었던 힘을 보충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독서의 매력이 아닐까?

 전염병에 의해 멸망하는 세상을 그렸기 때문에 코로나19로 급변하는 우리의 현재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더 허구적으로 느껴졌다. 소설이니까 당연히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허구적이라고 느껴진다는 느낌은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은 메타포의 향연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작가는 몇 가지의 평행 구조를 만들어놓고 끝없이 직유 및 은유하며 멈춤 없는 전개를 펼치고 있다.

그 몇 가지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국가의 단절
세계를 이끌어가는 연방 국가 미국은 마치 유럽 식민지 시절 이전 시절보다 후퇴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캔디스가  머무는 뉴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으니 다른 주, 도시들은 보여줄 필요도 없게 된다. 인디언이라 불리는 미국 원주민들은 땅의 경계 없이 근본적인 평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선 열병으로 인해 망가진 뉴욕(호은 미국)은 과거의 상태에서 평화라는 요소만 빠진 모습을 하고 있다.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위협적인 공간이다.

밥을 리더로 상점이나 주택을 습격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콜로니가 쇠락한 뉴욕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다만 그들은 아직 열병에 감염되지 않은 상태로 의지와 이동 능력을 가진 능동적인 조직이다. 그들은 습격을 할 때마다 신에게 기도하는 등 일종의 의식을 가진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마음을 공격하는 죄책감이라는 징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라도 하듯. 규칙이 있고 명백한 리더가 있지만 뭔가 석연찮다. 스스로 통제 능력을 잃은 뉴욕이나 뒤틀린 세계의 표상인 밥 일행이나 매한가지의 단절, 절망이라는 은유를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가족의 단절
캔디스는 자의로 미국에 자리 잡지 않았다. 많은 이민자 2세가 그랬듯이 부모의 뜻과 의지의 연속선상에서 그렇게 됐다. 하지만 가족을 이끌어가던 캔디스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도 단절 현상이 일어난다. 미국만이 살 길이라는 아버지와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답이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캔디스는 그저 시간과 상황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흘러 흘러서 결국 누구보다 뉴욕에 강하게 매몰된 화석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는 실러캔스가 아프리카 앞바다에서 발견됐을 때의 충격과 반가움의 교차는 NY고스트 블로그를 통해 캔디스가 망가진 뉴욕을 전 세계에 알리는 소설 말미에도 동일하게 표출된다.

 캔디스의 부모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강하게 충돌한다.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 형태의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를 둔 두 어른의 갈등은 자연스럽게 각종 단절로 연결된다. 캔디스의 가족도 그런 보편적인 과정을 따라 삶의 파도에 몸을 맡긴다. 중국 이민자 가족으로서 미국이라는 복잡 미묘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꽤 적지 않은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다. 사회에서의 유리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여러 커뮤니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며 그렇게 처절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캔디스도 결국 혼자되었을 때 부모들과 같은 선택을 반복한다. 열병이 창궐한 상황에서도 말이다.

3. 기업, 개인의 단절
 스펙트라는 캔디스가 일하는 출판 중개 업체이다. 타임스스퀘어에 위치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다. 기업이란 조직은 크면 클수록 변화를 두려워한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와 힘을 유지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에선 그 어떤 강한 조직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정한다. 결국 스펙트라는 구조조정을 꾀하고 있으며 소수의 희생제물만 남기고 움직인다. 하지만 건물은 그대로 둔다. 그 안에 끝까지 남은 것은 캔디스다. 기업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새로운 근로계약서로 제시하며 그 약속도 끝까지 이행함으로써 캔디스의 희생을 이끌어낸다.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기업은 진화의 루틴을 반복하며 멸망한다.

 조너선은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캔디스에게도 몇 번이나 같이 떠나자고 한다.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성이 결여됐으면서도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선택을 한 것 같다. 어차피 다 죽을 운명인데 움직이지 않고 후회하기보단 나은 것이니까. 그리고 루틴에서 자유로운 것은 역시 조너선밖에 안 보인다. 위태한 외줄을 타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방에 차곡차곡 개어진 옷가지들처럼 안정적이다.

서두에도 말했지만 작가가 단절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사전적 의미와는 다른 본질의 단절을 말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짝 지어지는 몇 가지 구조는 결국 인간 개인 내적으로 응집해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생명력을 상실한, 무기 물질과도 같은 루틴의 반복으로 멸망의 길을 갈 것이다. 뉴욕처럼, 스펙트라처럼, 콜로니처럼 말이다. 나를 잃지 않는 길이 단절을 막는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 진
이동은.정이용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무겁고 슬프게 보여주는 만화이다. 

 

20대의 진아는 부모를 잃고 고3 여동생 학업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낮엔 특수청소, 밤엔 대리운전을 한다.
40대 수진은 식당에서 일하며 20대 아들과 산다. 50줄을 앞두고 가까이 지내던 임소장의 아이를 갖고 만다.

 

삶은 소중하다. 삶의 모습에 따라 때로는 행복하고 마냥 즐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가장 무서운 것이 삶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삶이 내 목숨을 벼랑 바로 앞까지 몰아붙인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진아는 하루하루 그런 삶을 살아간다. 누가 손가락 하나로 툭 치기만 해도 마감될 것 같은, 그 결과가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위태로움이 뭔지 보여준다. 벌건 컬러로 표현된 진아 파트의 그림은 의도된 그대로의 감정을 품게 도와준다.

 

 

 

반면 수진의 일러스트 컬러는 현실의 느낌이다. 진아의 주변엔 죽음이 산적해 있지만 수진에게는 생명이 자꾸 생겨난다. 다만 완벽히 환영받지 못할 뿐이지만. 생명의 잉태라는 고귀한 것을 갖고 삶은 계속 장난을 쳐온다. 임소장의 답답한 언행들이 그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나마 멀쩡(?) 해 보이는 수진의 아들조차 삶의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진아보단 나아 보이지만 둘 다 삶의 공격을 한 몸으로 받고 견뎌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한다. 다른 형태의 '내 이야기'라는 생각도 같이 들기 때문에.

 

📚 "모르겠다.
누구는 그냥 살라 하고
누구는 대비하라 하고
대비하면서 하루하루 그냥 살면
끝인가...?
사는 의미는 뭔지 모르겠고
산 만큼의 세월은 더 남아 있는데
그 세월은 무엇으로 더 채워야 하나."(P.158-9) 

 

만화는 늘 즐거운 것이었다. 가볍고 익살스럽게 존재하여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주 콘텐츠다. 만화라는 수단이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강풀의 '26년', 윤태호의 '인천상륙작전'등이 그러했다. '진진'은 개인의 삶을 그렸지만 앞서 말한 작품들처럼 역사를 그렸다. 지금보다도 십 수 년 정도 지나서 보면 아마 2020년의 아픔과 외로운 정서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그 정서를 함께 추억하며 쓴웃음이라도 지어보려면,
이 세상의 모든 진아, 수진들. 다 살아있어라. 
 

 

 

 

삶은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의 물리적 흐름이 아니라 조건 없이 주어진 선물이면서 필사적으로 싸워 살아내야 할 대상이다. 성의 없는 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같이 힘내자. 2020년이 덜 고통스럽게 기억되려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