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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경제학 - 사람을 살리고 자연도 살리는 살림살이 경제학!
강수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행복에 관한 책이다. 저자 강수돌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음에 분명하다. 『살림의 경제학』은 이 사회가 사람들의 행복을 어떻게 가로막고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있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대안까지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장이자 교수인 강수돌은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를 끄덕이며 깊이 공감했음에도 마음이 편안했던 것은 아니다.
진실을 마주 대해야 했고, 진실이란 때로 크나큰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십 년 대한민국은 비약적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어떤 자는 선거 공약으로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내걸었으니 선진국이 꿈만은 아닌 모양이다. 길거리에 자동차가 넘쳐 주차장이 돼있고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다. 옷이며 가구 등 생필품들은 멀쩡한 것들이 쓰레기장으로 향하고 있다. 참 ‘풍요로운’ 시대이다.
반면에, 북극의 얼음은 다 녹아가고 있고 기후 변화로 지구촌 곳곳이 몸살을 앓고 있다. 화석 에너지에 기초한 사회경제 시스템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뿐인가? 이 순간에도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한명씩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들과 자영업자들은 날이 갈수록 더 힘들기만 하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경제성장에 걸맞게 행복해야 하는데 오히려 불행해져만 간다.
왜인가?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죽임의 경제’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수많은 근거들을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생산성이란 경향적으로 파괴성의 생산성이며, 근본 이유는 그것이 필요(살림살이)의 경제가 아니라 이윤(돈벌이)의 경제인 까닭이다.
따라서 생산성이 올라갈수록 더 치명적인 파괴는 확대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이다.
이것은 발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실 우리 자신 역시 이 죽임의 경제에서 조력자로서 기능하고 있다. 사회경제시스템과 교육, 문화 등 사회적 구조가 자본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노동력의 생산에 기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한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가 이 사회에 살면서 경쟁의 사다리 질서에 순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연스럽게 자본의 논리, 죽임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중독과 소비중독은 일상이 되었고 개발의 논리에 저항할 힘을 잃은 지 오래다.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는 공전의 히트를 치며 온 국민의 뇌리를 깊숙이 파고들었으며 이제 가난은 죄악이 되고 말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이 죽임의 경제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우리 자신이 이 패러다임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해서 ‘살림의 경제’를 실천하는 길밖에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은 이미 숱한 세월 동안 수없이 제시되어 왔다. 그것은 주로 소유와 권력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립은 자본과 노동으로부터 비롯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강수돌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넘어 자본과 생태의 대립을 오히려 더 중요한 관계로 본다. 노동 자체도 상당 부분 이미 자본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자동차가 더 많이 팔릴수록 좋다고 보지만 그것은 생태적 관점에서는 파괴를 증폭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다름과 같은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본의 질서 안에서 ‘배부른 임금노예’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자가 미래의 희망으로 들고 있는 것은 ‘자율적 생태공동체’ 또는 ‘대안공동체’이다. 농업은 사양산업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핵심산업이다. 소농은 ‘쁘띠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갈 주체세력이다.
또한 저자는 대의정치에 그다지 기대를 걸지 않는다. 위로부터의 정치, 대규모를 지향하는 정치, 중앙 권력자에 의해 대리되는 정치를 넘어 아래로부터의 운동, 소규모 연결망 운동, 분권과 자치의 운동을 추구한다.
저자는 ‘마을’을 새로운 살림살이의 출발로서 설정하고 있다. 삶의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강수돌 교수가 이장으로서 전개해온 운동은 이에 대한 명확한 사례였던 셈이다.
이밖에 ‘나부터’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영역으로는 생협운동, 대안교육운동, 귀농운동, 마을공동체운동, 대안화폐운동, 대안에너지운동, 노동자기업운동, 공정무역운동, 대안세계화운동 등을 들고 있다.
이 운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계급계층 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소통과 연대야말로 이 운동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다. 강수돌은 이와 관련해서도 상단한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은 서술은 그의 연구와 실천으로부터 비롯된 고뇌와 지혜를 표현하고 있다.
“분노와 증오는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우정과 환대, 소통과 연대, 애정과 유대야말로 해결의 실마리다. 이를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고 토론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만들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아직도 희망은 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불편했던 연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저자 강수돌 교수는 우리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화석에너지 경제를 당연한 것으로, 물질문명의 총화로서 그 편리함에 취해 있다. 걷기보다는 자동차, 그것도 혼자서 승용차를 타고 많은 시간을 보낸다. 밤의 어둠에 익숙치 않고 대낮처럼 밝은 전등불이 있어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일상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죽임의 경제를 24시간 실천하고 있다.
물론 착한 설탕에 착한 커피 마시며 세상에 기여하고 있노라고 자위하고 있기도 하다. 강수돌은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완전하게 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니 나는 이념세대다. 권력에 대한 항거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믿었고 실제로 세상이 조금 변하기도 했다. 흔히 말하듯이 선거는 대중의 교육 공간이라는 경험이 온전히 잘못되었다고는 아직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반면에 대의정치에 맛을 들여 정치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고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에 소홀했던 것도 아프지만 사실인 것 같다. 이른바 ‘강남좌파’란 신조어가 왜 나왔겠는가? 강남좌파는 강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소화하지 못했다. 긴 시간을 두고 되새김질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도 당장 약효가 적지 않음을 느낀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