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장 / 구운몽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평점 :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헤밍웨이는 소설『노인과 바다』를 다 쓴 후에도 도입부 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해 수 백 번을 고쳐 썼다고 했다. 소설에서 첫 문장이란 그만큼 중요하다. 나는 광장의 이 첫 문장을 좋아한다. 광장의 이 첫 문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도입부로 손 꼽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문장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에 두 번째 읽게 되었을 때, 나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의 바닷속에서 가프게 숨을 쉬고 있는 명준을 볼 수 있었다. 바다는 명준이 숨 쉴 수 있는,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광장이었다. 그곳은 북조선에서 그에게 유일한 쉼터가 되어주었던 은혜와, 그녀와의 사랑의 결과물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광장이다.
소설은 광장 위의 배, 정확히 중립국으로 향하고 있는 타고르호 위에서 명준이 시선을 느끼면서 시작한다. 배 위에서 자꾸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그 시선은 타고르호를 따라 항해하고 있는 흰 갈매기 두 마리의 시선이다. 선장은 뱃사람들은 그런 새를 ‘뱃사람을 잊지 못하는 여자의 마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명준은 갈매기를 보며 옛일을 회상한다. 철학과 3학년이던 그가 어떻게 이 타고르 흐를 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남조선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느닷없이 서에 불려간다. 월북한 아버지가 대남 방송에 나오는 것을 빌미로 명준을 부른 것이다. 그는 형사에게 폭행을 당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를 부르짖던 남한의 땅에서, 일순간에 그는 법의 보호 밖으로 소외된 사람이 되었다. ‘빨갱이 혐오’ 앞에선 법도, 권리도 모두 무력해졌다. 소외된 그가 찾은 광장은 윤애였다. 그러나 명준에게 있어 윤애는 전부를 내어주지 않는, 확신할 수 없는 존재였고, 불완전한 광장에서 명준은 도망치듯 북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명준이 만난 인민공화국은 그가 상상하던 혁명의 땅이 아니었다. 이미 혁명의 불꽃이 다 타버린, 잿빛 공화국이었다. 피가 끓는 혁명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개인적인 ‘열정’ ‘욕망’을 터부시하는 곳, 오직 ‘당’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명준은 또 자신이 설 광장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 명준에게 설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내어준 것은 이번에도 여자, 은혜였다. 그녀는 윤애와는 달리 확실한 광장이었다. 좁아지는 부채꼴의 마지막 그가 설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전쟁은 그에게서 그런 공간마저 앗아가버린다. 이렇게 서 있던 모든 공간을 빼앗겨버린 명준은 중립국으로 향하는 타고르 호에 몸을 싣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타게 된 타고르호에서 그는 따라오는 갈매기의 시선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곧 그 갈매기가 은혜와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거기서 새로운 광장을 발견하게 된다.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광장,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결실이 기다리고 있는 광장. 그는 웃는다.
나는 숨이 턱 막히었다. 읽던 내내 답답했었던 가슴은 끝내 뚫리지 못하고 아예 막혀버리고 말았다. 과연 그 푸른 광장은 새로운 희망인 것일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나는 소설에서 한 줄기 희망도 찾지 못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인간, 북에도 남에도, 그 동료들에게도, 심지어 사랑의 울타리 안에도 속하지 못했던, 정말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명준에게 세상은 디스토피아 그 자체이다. 무사유와 혐오가 판치는 세상, 그 둘이 얽히고설켜 풀 수 없는 실타래가 되어버린 지옥이다. 나는 읽는 내내 『1984』를 읽던 때보다 더 절망스러웠다. 그 이유는 소설 속 현실이 우리의 과거였고, 또한 현재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명준이 설 광장이 있는가. 아직까지도 ‘빨갱이 프레임’을 씌우고, ‘적폐’로 지목해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 여성 혐오, 남성 혐오가 판치고 인종차별이 존재한다. 나는 현실에서도 소설 속 광장 없는 세상이 보인다. 우리는 과연 명준이 설 수 있는 광장을 만들 수 있을까? 『광장』속 명준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배에서 사라져버린 명준의 마지막은 아쉬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