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우주에 마법을 걸다 - 현실에 대한 통합적 비전의 등장
에르빈 라슬로 지음, 변경옥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철학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개인의 해석에 따른 여지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이 책에서 주장하는 과학과 영성의 긴밀성이라는 것은 기존의 과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요소, 즉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에서 놀랍다.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상에 대한 연구 결과 또한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다. 그 탓에 에르빈 라슬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철학적이다. 특히 책에서 보여주는 실험결과들, 즉 전생을 체험하는 사람들과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하려는 여러 노력들은 지나치게 미신적이고 광신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도록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긴밀성에 대한 부분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긴밀성, 즉 상호연관성은 카오스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으며, 그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부분과 비슷하다. 이 세계, 혹은 이 우주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생각한다면, 어느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모든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제법 일반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수긍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 스스로를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면, 세계 모든 인간들과 생물, 자연 체계 등의 시스템을 하나로 모아 구축한 것이 바로 지구이며, 이 비슷한 시스템들이 모여 구축하게 되는 것이 또 우주라는 뜻이다. 이것은 거꾸로 보자면, 스스로가 곧 우주이며, 우주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에르빈 라슬로가 말하는 '전체로서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일견 확실한 일체감과 소속감을 통해 우리 스스로인 우주를 통해 세계의 근본에 대해서도 체험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까지 치닫는다. 그것은 곧 우리 영혼이 우주라는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어떤 곳에서든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간혹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 즉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들은 체험이 가능하며, 이러한 예를 들어 우리 모두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주의 기억, 즉 우주가 체험한 것들을 모두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르빈 라슬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이며, 전일적인 우주에 통합하여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역설한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주술사와 샤먼, 구도자와 현자, 그리고 용기를 내어 멀리 내다보고 자신이 본 것에 열린 태도를 보였던 사람들에게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므로 놀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에르빈 라슬로는 우리가 죽고 나면, 이러한 생각 혹은 가설, 주장에 대해 더욱 더 강한 확신을 품은 채 우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이런 견고한 믿음은, 앞서 말했듯이 지나친 미신과 광신의 결정체로 보일 염려가 있다.  쌍둥이 통증 공유(twin-pain)나 임사체험,  전생체험 등을 통한 증명은 더욱 더 믿기 어렵다.

 

 물론 그의 말처럼 내가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등은 결코 체험하지 못할 것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같은 불가지론자가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음을 가지지 않는 것은 그것에 대해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류하고 있는 것 뿐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더군다나 과학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라야 하는데, 에르빈 라슬로의 주장은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또한 현대에 들어 영적 차원에 대한 탐구는 점점 미약해져만 가는데, 간혹 명을 잇고 있는 이들은 더욱 더 광신적인 상황으로 치닫기를 이끌려 하기 때문에 더욱 더 믿기 어렵게 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될만 하다.

 

 아마 이러한 간극에서 오는 딜레마는 쉽게 좁혀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가능성의 여지까지 짓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코페르니쿠스가 목숨을 걸고 지구가 돈다고 말했을 때야 비로소 태양이 멈추고 지구가 돌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태양은 계속 멈춰 있었지만, 우리 믿음 속의 태양은 그때서야, 그것도 깨어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멈춰 있지 않았나. 다시 말해, 비록 에르빈 라슬로의 주장이 아직 정설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수가 주장하는 의견을 정설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그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옳기 때문은 아닌 탓이다. 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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